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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옛살라비

하늘꿈꾸미 2013. 9. 8. 15:14

한가위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에는 시골에 가는 일이 옛보다 많이 줄었다.

맏님이 한밭에 집을 마련하시어 설날 한가위날 그리고 식게날 한밭으로 가니 오가기 한결 쉬워진 게 참 좋다.

그러니 시골 옛살라비에 가는 일이 한 해에 거의 한 축으로 많이 줄었다.

그러니 시골에 같이 살았던 마을 사람들도 만나기가 어렵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서울로 어디로 떠났고 거기 그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함께 시골에 와서 만날 까리도 줄어들었으니...

더구나 길이 막히니 시골에 오더라도 서둘러 돌아가니 더우기 마을 사람을 찾아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니 멀리 움직이는 것이 마음부터 어렵게 느껴져 힘들어진다.

 

서울에서 08:30쯤에 떠났건만 갱갱이에 한낮이 지나서야 다다른다.

갱갱이라고 부르는 가람볕(강경)은 깁가람(금강)에 붙어 있고 넓은 들에 있어, 앗선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부르나(평양) 달구벌(대구)과 함께 세 큰저자를 이루어 왔다고 한다.

여기 가람가에 있는 맛집에서 칼국수로 낮밥을 때우고 둘레를 돌아 본다.

 

 

 

 

 

 

 

 

 

 

 

고깃배였었나?

고기가 안 잡혀 고기잡이를 그만 두었나?

어려서 시골에 살 때만 해도 여기 가람에서 고기가 많이 잡혔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도 물고기 장사가 소리지르며 물고기를 팔러 다녔다.

우여 메기가 생각나는데 이런 것들이 많이 잡혀 우여를 몇 두름씩 사서 말려서 구어먹었었는데...

우여 날저미어 초고추장 넣고 비벼먹으면 엄청 맛있었다.

구어먹으면 기름이 많이 나오고 고소해서 참 맛 좋았었는데...

 

 

 

옛날 드나들던 배들에게 길을 밝혀주던 불대(등대).

다리가 놓이기 앞에는 이곳에 나룻터가 있어 타고 내리던 곳이 바로 옆이었다.

가운뱀터를 다닐 때에는 날마다 이곳에서 젓대를 젓는 배를 타고 건너왔다 건너가곤 했다.

겨울에는 어름들이 있어 양쪽으로 배를 굴러 물결을 일으켜 얼음을 깨고 헤쳐가기도 했었다.

젓대배가 통통배로 바뀌고 다음에는 수레도 싣고 나르던 큰 배로 바뀌었다가 1980해띠에 다리(놀메큰다리)가 놓여지게 되었다. 

 

여기는 놀메울(논산시)이고 건너는 붇들어남은고을(부여군) 사람길낯(세도면)이다.

 

 

돌메 위에 바라보는 곳을 만들어 놓았다.

아직 올라가 보지는 못했는데...

그곳이 가운뱀터 다닐 1960해띠에는 돌을 캐내는 곳이었다. 돌에 구멍을 뚫고 텆몬을 터뜨려서...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구슬가시봉(옥녀봉)

가운뱀터 다닐 때는 저 봉우리가 꽤 높아 보였는데...

 

여기도 네큰가람일을 해서 가람가에 두발수렛길도 만들고 잔디도 입히고 나무도 심고

몸담금질하라고 여러가지 연장들을 가져다 놓았나 보다.

 

 

 

 

 

 

요즘에는 갱갱이 어딜 보나 젓갈집이다.

밑뱀터 다닐 때 아버지 따라 닷새마다 열리는 저자날에 왔다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랐다.

윗저자터 아랫저자터 거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꽉 찼었다.

 

 

놀메큰다리를 수레를 타고 건넌다.

다리가 참 좋다. 배를 타고 건너려면 뱃때를 기다려야 하고 배가 떨어지면 건널 손도 없고...

돌아가던지 자고 가던지...

짐이 있으면 실었다 내렸다 얼마나 힘든가?

옛날 겨울에 가람물이 얼었을 때는 그냥 건너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 때는 시골에서 가마니라고 벼나 쌀을 담는 볏짚으로 만든 자루를 짜서 내다 파는 것이 겨울철 돈벌이였다.

집에서 쓸 것을 짜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겨우내 그 일을 하여 돈을 벌었다.

그것을 지고 어름얼은 강을 건너 가람볕저자에 내다 팔았었다. 

우리도 어려서 새끼라고 볏짚 두 가닥을 손으로 꼬아 길게 줄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 새끼를 가마니틀에 날줄로 바디구멍들에 끼어 걸어놓고, 바디를 이쪽 저쪽으로 겨끔내기로 졎히고,

볏짚을 물에 축여 새끼줄 사이사이로 엇갈려 바늘로 끼우고 바디라는 나무로 내리쳐서 짜는 것이다. 

 

 

 

 

 

이곳이 갈대밭이었는데, 여름엔 갈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서 배움터를 다녔고...

갈대를 베고 논으로 만들어 벼를 심었었는데...

그 때는 길도 자갈을 깔아 어쩌다 큰수레가 지나가면 자갈도 튀고 먼지가 뿌옇게 나서 걸어다니다가 그 먼지를 마시고 다녔는데...

좀 돈이 있으면 두발수레를 타고 디니고...

가끔 마을 사람들에게 길에 자갈 깔라고 나오라고 해서 나가서 자갈을 주어다 깔고 길을 고르고 했었다.

그 때 해섬(일본)에서는 시골길도 아스팔트를 깔았다고 해서 우리나라는 언제 그런 때가 오나 했었는데...

 

뚝 밖 모래밭에는 땅콩을 많이 심었었다.

참외와 수박도 많이 심었었고...

 

 

 

비닐집을 짓고 여러가지를 심더니 하나 하나 집이 생기고... 

 

 

 

이제는 마을이 생겼네요...

 

 

 

저기 보이는게 우리 마을

가운데 보이는 것이 어진사람밑뱀터(인세초등학교)

 

 

 

 

 

밑뱀터 다닐 대는 한켜집이었는데, 나중에 두켜집도 짓고...

그런데 이제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 안된다니...

밑뱀터가 마을에 있어서 좋았었다. 아주 좋은 놀이터...

집에서 여섯 온 저자(600m)쯤 떨어져 있었다.

뱀터를 세울 때 우리 집안에서 땅도 내놓고 한 것 같다.

다른 마을에서도 그리로 가져갈려고 했는데 이리로 왔다는 것 같다.

 

 

 

아이들 다니는데 아늑하게 다니라고 길도 새로이 만들고 울타리까지 만들었는데,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없단다.

아이들이 줄었고 또 어버이들이 수레로 태워다 준단다. 

돈만 들이고 수레길만 좁아졌나?

 

 

마을모임집

 

드디어 집에 왔다.

 

가운데 번힘기둥 왼쪽에 이영집으로 지어서 살았는데, 그 집을 뜯어다 1970해띠에 이 자리에 지었다.

지붕은 지새(기와)로 올리고...

 

옛집도 다른 집들에 견주어 늦게 지어졌기에 새집이라 불렸다.

집이름이 '새집'이 되었다. 그래서 새집할아버지 새집아저씨...

우리 맏아우들은 그 옛집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집이 새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침이면 일찍부터 밝았다.

옛집터에서 가운뱀터까지는 네즈믄자쯤 되었다.

걸어서 한 때새쯤 걸린 것 같다.

3해 동안 걸어서 다녔다.

그리고는 한밭으로 나가서 세 해 그리고 서울로...

 

 

 

 

 

가운데 왼쪽에 집 하나 조그맣게 보이는 곳에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 있다.

요즘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밑뱀터 다닐 때는 여름에 늘 거기서 놀곤 했다.

헤엄을 칠 줄 모를 때였으니 얕은 곳에서만 놀았다.

머리를 박고 팔다리를 막 젓다 머리를 드는 것으로 헤엄을 배웠다.

그 다음에는 드러누어서 헤엄을 치고, 그래서 몇가지 헤엄을 배우고는 이곳을 떠났는데...

헤엄을 배우기 앞서 바닥을 딛고 목까지 닿는 곳을 다니다가 갑자기 깊은 곳이 있어 허우적거리며 놀랐는데 옆에 있던 아이들이 건져서 나온 적도 있다.

 

 

 

저쪽 끝에 큰 물막이가 있다.

 

 

 

 

 

 

 

헤엄을 배우고 좀 커서 놀던 곳...

여기 넓이가 5.8헥타아르?

멀리서도 낚시꾼들이 온다.

 

 

 

 

 

 

 

 

 

 

 

 

 

 

 

가운데 흙이 보이는 곳이 세때배기라고 불렸다.

아마도 솟대박이가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가?

아마도 옛날에 이곳에 솟대가 있던 곳이 아닌가 싶다.

 

 

 

 

 

우물이다.

지금은 뚜껑을 해 닫았다.

그리고 여기서 물을 끌어올려 집에서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도록 해 놓았다.

어려서 자랄 때는 뚜껑도 없었고,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얇은 쇠붙이널로 만든 물그릇에 두레박으로 물을 퍼 담아 두 그릇을 물지게에 두쪽에 달고 어깨에 메고 등에 지어 날라 두멍에 쏟아 놓았다.

아낙네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어 나르기도 하고...

빨래도 여기서 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옛살라비로 간다.

곰나루고을(공주군) 닭미르낯(계룡면) 쇠띠마을

 

 

저기 보이는 메가 닭미르메(계룡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