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숙골에서-> 흰구름봉(백운봉)->미르메(용문산)->마당바위->미르오래절(용문사)
예부터 미르오래메(용문산)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아직 가보지 못하였다.
거기를 가보기로 하고, 누리그물(인터넷)을 뒤져 땅그림과 여러 가지 아름(정보)을 모으고,
긴수레로 가기로 하고 자리를 잡아 놓았다. 찾아보니 그 메의 이름이 용문산으로 된 것은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며,
그 앞에는 미지(彌智)산이었다는 것이다.
용은 민우리말로 '미르'나 '미리'이므로, 미지는 이를 됫글로 바꾸면서 그렇게 쓴 것이고,
민우리말로 하면, 미르메나 미리메였을 것이다.
그런데 됫나라 붙쫓는 데 이골난 사람들이 한 술 더 떠서,
무슨 잉어가 뛰어오르면 미르가 된다는 노랑가람(황허)의 여울 미르오래(용문) 이야기를 끌어들여,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옛이름을 되찾는다면, 미르메라 함이 맞지 않을까? 미르메는 높이 1,157저자로, 꼭대기는 판판하고,
가파른 물매의 새마(동남)비탈은 미르내(용계) 따위 깊은 골짜기와
물떨기(폭포)·야릇한 바위와 돌이 어울려 날빛(경치)이 빼어나며,
메의 새마쪽 기슭에 미르오래절(용문사)이 있고,
높이 62저자 둘레 14저자의 1,100해가 넘은 흰살구(은행)나무(날터새김몬 30째) 가 이름나다고 한다.
10달 나흗날 아침 7때 시원마을참(청량리역)에서 긴수레를 타고 버들숫돌?(양평)로 떠난다.
양평군은 양근(버들뿌리)군과 지평(숫돌을 고르다)군이 하나 되어 한 글씨씩 따서 지은 이름이란다.
그러면 버들고름이 되나?
무슨 이름을 이 따위로 짓는지?
한쪽은 버드나무가 한쪽은 숫돌이 많이 난다면, 버들숫돌로 하던지!
8때에 버들숫돌참(양평역)에서 내려 새숙골을 찾아 간다.
왼쪽으로 가다 쇳길을 밑으로 지나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 다시 왼쪽으로 틀어 쭉 갔다. 길을 물어물어 갔는데,
가다보니 길탈고침집(길병원)이 나타나는데, 그 앞에 큰 길이 있고, 그 길이 버들숫돌참(양평역)쪽에서 구름다리를 넘어 온다고 한다. 이 탈�집은 처음에는 미추홀(인천) 길탈�집과 끈매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냥 아람(개인)탈고침집이란다.
그 길을 좀 가다, 공흥1리라고 새긴돌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 쭉 가야 하는데,
조금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하는 줄 알고, 꺾어들어 어느 집 앞에서 길을 물으려 하는데,
개만 짓고 사람은 나오지 않아 이럴까 저럴까 5난 기다리다,
계십니까하고 소리치니 한 분이 나와 길을 물으니, 가던 길로 쭉 가야 한다고 하여 가는데,
저기 한 사람이 메탐옷을 입고 자루를 메고 온다.
그 분도 흰구름봉으로 간단다.
함께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드물다고 하니, 버들숫돌에 닷새저자(5일장)가 사흗날하고 여드렛날 열린다는 것이다.
그 때를 맞추어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번김쇳길(전철)이 다음해에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곳 집땅값도 많이 올라 늠내(넓은땅:시흥)나 곧님?(곧은 임금:이산이 애꿎게 죽은 아버지를 기려 달마다 아버지 무덤을 찾아왔다 가다 머물었던 곳:의왕)과 견주어진다고 한다.
새숙골은 새수골 세수골로 씌여진 곳도 있으나,
마을에 돌로 새숙골로 새겨져 있었다. 그 뜻은 제대로 모르겠다.
민우리말에 마주한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길을 꼼꼼히 보지 못하고, 어느덧 약수사에 다다랐다.
찍음틀을 내느라 머뭇거리니 같이 가던 분은 길이 바쁜지 천천히 오라며 앞서 간다.
곧 따라간다 하였으나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다.
약수사를 9:10에 지난다. 절이름을 잘 보지 못하였다.
미르메날터쉼숲(자연휴양림) 수레둠터(9:12)
쉼숲의 쉼집
이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올라간다(9:17)
한참 올라 가니 두리봉으로 가는 길과 갈림길이 나타난다(9:31)
이런 다리도 나타난다(9:35)
녹나무과 생강나무라고 쓰여져 있다(9;43)
날씨는 안개가 가득 끼어 이런 안개속을 내쳐 걸을까 비는 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올라 가면 날이 들겠지 바라면서 간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찌검틀 밥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깜빡 새로 갈아 넣는 것을 잊고, 다른 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얼마를 올라가니 샘터가 나타나는데, 온해샘(백년약수)라고 씌여 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온 해 동안만 나오고 안 나온다는 것인지?
내려가는 길의 세 사람을 만났다.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물 한 그릇을 마시며 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안개를 뚫고 다시 한 참 가니 잠날터(잠자리날음틀터)가 나온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날이 들어 햇빛도 좀 나나, 아직 앞이 훤히 보이지는 않는다.
흰구름봉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르다.
쇠서다리와 나무서다리 또 가파른 길을 올라 간 뒤에야 740저자의 멧부리에 10때 50난쯤 이른다.
약수사를 떠난지 한 때새 40난에 이른 것이다.
한 쪽에 나무로 구경대(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한 사내가 거기서 몸을 놀리며 김을 받는지 하고 있고,
저쪽에는 한 어우렁(쌍)의 산갓(사내와 가시:남녀)이 낮밥을 먹고 있다.
또 하나됨바위(통일암)라고 새김돌 위에 돌을 올려놓았다.
우리나라의 하나됨(통일)을 바라 흰두루(백두산)에서 흙과 돌을 가져다 놓았다는 것인데,
뒤에 새겨놓은 글이 몇 군데 쪼아져 없어졌다.
흰구름봉에서 보는 날빛이 엄청 좋다는데, 안개에 덮여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미르메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처음부터 쇠서다리다.
그리고 밧줄들을 드리워 논 가파른 길로 이루어졌다.
골짜기에 흰 안개구름이 다시 밀려온다.
미르가 올라갈려고 그러는가?
조금 보일 뜻 하던 날빛이 안개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 봉우리(865?)를 넘고, 다시 한봉우리(856?)를 넘고, 또 올라가다 쉰다. 11때 30난이다.
등성이길로 가다 길을 잃어, 오른쪽으로 내려가 길을 찾아 간다.
11때 40난 셋째 봉우리(887?)에 다다른다.
봉우리에 나무로 열 사람 남짓 앉을 수 있게 구경대를 만들어 놓았다.
몇 사람이 앉아 있다. 참 가파르다고 생각하며 오르다 이런 쉴 곳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거기서 앉아 쉬면서 길을 물어 보고 다시 나선다.
앞길이 머흘은지(험한지)를 물었더니 어떤 분은 지금 온 길보다 머흘다고 하고,
한 분은 지금까지 온 길보다 머흘지는 않다고 한다.
뒷뒤 사람 이야기가 맞았던 것 같다. 조금 내려오니 잠날터가 또 있고, 또 조금 내려가니 갈림길이다.
잠자리처럼 생겨서 잠자리날음틀인데, 잠자리는 왜 잠자리라고 하였을까? 잠자리라고 하면 잠을 자는 자리인데, 사나이와 가시가 포개 누운 것이 잠자리 꼴과 비슷해서일까 생각을 하며 걷는다. 다음 넷째 봉우리에는 12때 10난쯤 이르렀다. 사나사 3.2즈믄저자 흰구름봉 2.1즈믄저자 머리쌈봉(장군봉) 1.1즈믄저자 상원사 3.1즈믄저자라고 씌여져 있다. 왼쪽 골짜기에 두루임금(?)잣터(함왕성지) 사나사 두루임금(?)굼(함왕혈)이 있다.
두루임금(함왕)은 세한(삼한)때 처음에 사나사 들머리 골짜기에 있는 두루임금굼(함왕혈)이란 큰 바위굴에서 태어나, 그 둘레의 임금이 된 주악이란 사람으로, 이곳을 지키려 잣을 쌓았으나, 세한에 무릅꿇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두루임금잣터(함왕성지)는 그 뒤 고려때에 쌓아 몽골이 넷제째 처들어왔을 때에 가까운 곳 사람들이 이리로 달아나 들어왔었다 하며, 안잣(내성) 둘레는 2즈믄저자(㎞)에 이르고, 바깥바람(외벽)은 바위 벼랑을 살려 쌓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잣 둘레가 29,058자(8,800저자쯤)에 이르렀지만,
요새는 700저자쯤만 남아 있으며, 높새(북서)쪽 잣은 잘 간수된 것으로 보인다.
사나절은 933해 대경큰스님이 융천이란 가르친 이와 함께 처음 지은 절로
노사나부처를 모셔 이름을 사나사라 하였다 한다.
노사나부처란 깨달음을 가르치기 앞서 스스로 깨달음을 꼼꼼히 살펴보는 부처라고 한다.
다음 다섯째 봉우리(함왕봉?947)에 12때 25난쯤 다다랐다.
땅을 잴 때 쓰는 세모찜(삼각점)이 있고, 나무토막들만 몇 낱 널브러져 있다.
멧부리돌도 길잡이나무도 없다. 10난쯤 가다 쉰다.
12때 55난 꼭쌈봉(장군봉 1,065저자)에 다다른다.
장군을 민우리말로 무어라 할까?
군인은 치기꾼이라고 한다고 한다.
우두머리치기꾼 좀 길다. 치기꾼도 길다.
침이 치미 줄여 침. 우두머리를 머리로 줄이면 머리박고 싸우는 것 같고, 다른말로 꼭지로 하고 더 줄이면 꼭.
꼭지치미 줄여서 꼭침? 또는 치기꾼을 싸우미 줄여 싸미 쌈.
꼭지싸우미 꼭쌈. 아래 찌검들은 찌검이 없어 너무 밋밋하여, 누리그물에서 빌어다 넣은 것이다.
그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좀 더 조금 가니 13때쯤 가는길 오른쪽 옆에 긴네모의 판판한 돌이 놓여 있다.
한 둘이 앉아 밥먹기 딱 알맞다.
여기서 낮밥을 들고 길을 가는데,
미르멧부리(용문산꼭대개)가 눈앞인데 쇠가시그물이 보인다.
그것이 왼쪽부리(1155?)인가 보다.
못 가는 길이구나 생각하고, 열 저자 남짓에서 보고 뒤로 돌아 오른쪽으로 길을 잡는다.
메 어깨를 돌아가는 길이다.
지루하게 한 참 가니, 왼쪽에 쇠서다리가 나타난다.
그 쇠서다리가 가파르게 엄청 길다.
그 서다리를 타고 맨꼭대기(1157)에 오르니 14:00이다.
이곳은 나라지킴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메타는 사람들이 꼭대기에 올라 올 수 있게 된 것은 2007해 11달 17날부터이며,
아침 8:30 부터 뒷낮 5때까지 란다.
그 서다리를 다시 내려와 길을 잡고 간다.
처음에는 문례재쪽으로 가다 미르오래봉(용문봉) 537봉으로 해서 미르오래절로 내려오는 길을 잡으려 했는데,
그 길을 잘못 잡았는지 바로 마당바위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내려가서 길잡이그림을 보아도 그 쪽 길은 나타나 있지 않다.
14:40에 상원절로가는 갈림길에 다다르고,
마당바위로 가는데, 길이 가파르고 바위길이어서 매우 지루하고 힘들다.
언제나 마당바위에 다다르나 하는 생각으로 가는데, 길이 줄지 않는다.
한참 가도 100저자 밖에 못 왔고,
또 가도 100저자 밖에 못 왔고 이런 생각으로 길을 간다.
15:05에 드디어 마당바위에 다다랐다.
열 댓 사람이 바위위에 올라 쉬고 있다. 나도 바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가져온 열매를 하나 먹으며 쉰다.
바위는 높이가 2저자 둘레가 몇 저자라고 써 놓았는데 그 셈글씨를 누가 지워 놓았다.
무슨 마음씨가 그러한지!
한 서른 저자는 되지 않을까 어림해 본다.
다시 길을 잡아 15:50에 미르오래절에 이르렀다.
흰살구(은행)나무가 엄청 크다. 나무 둘레를 울타리를 치고, 나무 아래에는 천인가로 덮었다.
나무 밑에 그릇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쇠돈을 던져 넣는다.
들어 간 것도 많지만, 둘레에 떨어진 것도 많다.
이 절은 서라벌 913해 대경큰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한다.
경순왕(927-935)이 몸소 와서 나라가 아늑하도록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1907해 옳은싸우미(의병)의 보금자리라는 까닭으로 해섬치기떼로 말미암아 모두 불태워졌다.
이제의 솟집은 6.25 뒤 다시 지은 솟집들이다. 절집이 여러 채로 큰 절이다.
큰 나무를 다 나오게 찍느라 멀리서 옆으로 찍은 것 같다. 절 둘레를 둘러보고 볼일도 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미르메구경터(용문산관광지)가 나온다.
여러 가지 놀이 연장들을 갖추고 있다.
왼쪽에는 버들숫돌 둘레사이좋은씨갈이보임집(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있고,
바깥놀음마당(야외공연장)도 더 올라가서 있다.
두루 둘러 보다 16:40큰수레를 타고 17:00미르오래참(용문역)에 이르렀다.
긴수레 때를 보니 조금 앞에 떠났고, 다음 긴수레는 내가 미리 산 18:28 것이다.
기다렸다 그 긴수레를 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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