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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땅(모로코)을 밟다(6/2~6/4)

하늘꿈꾸미 2013. 7. 1. 10:41

아프리카로 가는 뱃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스페인의 타리파에서 큰저바다(대서양)와 땅가운데바다(지중해)가 만나는 지브롤터 좁은 바다(14즈믄저자)를 건너 모로코 탕헤르로 들어간다.

 

 

 

지브롤터(Gibraltar)는 타리파에서 좀 더 땅가운데바다쪽으로 떨어져 있는데, 

스페인 땅이었으나 잉글나라땅이 된 것은 스페인임금자리잇기싸움 때문이었다.

스페인임금자리잇기싸움(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에서 여러 유럽의 힘있는 나라들이 힘을 모아 프랑스가 스페인의 임금자리를 잇는 것을 막고 유럽의 힘의 가눔을 바꾸었다.

이 싸움에서 스페인과 프랑스가 짐으로써 프랑스임금은 스페인임금을 함께 할 손 없게 되었고,

지브롤터(5.8제곱즈믄저자)는 잉글나라의 차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돌려달라고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잉글나라가 틀어쥐고 있다.

 

 

지브롤터 맞은켠 모로코쪽의 지킴목인 세우타(Ceuta 넓이 20제곱즈믄저자 사람셈 7골쯤)는 1415해 포르투갈이 차지했다,

다시 1580해 스페인에게 넘어갔고, 리스본 조약(1688)으로 스페인 땅으로 굳어졌다.

모로코는 스페인에 돌려달라고 하고 있단다.

타리파 나루

 

배안에 있는 까페

 

 

  

 

모로코의 탕헤르로 건너왔다

 

 

타고 온 배

 

 

 

 

 

 

 

모로코 서울은 라바트이다.

노새(북동)에서 마저(남서)의 가장 긴 길이는 1,328즈믄저자이고

새저(동서) 가장 넓은 너비는 764즈믄저자이다.
넓이 710,850제곱즈믄저자(저사하라 말썽있는 땅 252,120제곱즈믄저자 함께),

사람셈 31,690,000(2009해 셈, 저사하라 405,000사람 함께).


모로코는 이제는 베르베르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좀더 바르게는 아마지그사람 따박이 흘러 다니며 짐승기르는 사람들이 옛부터 살던 곳이다.
매우 이른 때부터 카르타고의 다스림을 받았던 이 곳은 나중에는

로마가 쳐들어왔던 가장 저쪽 고장이 되었다.

7온해 뒷가웃 아랍이 들어오면서 노(북)아프리카로 넓어진 고장은

아랍말로 저(서)쪽을 뜻하는 마그리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이어진 모로코 임금나라들은 저아프리카 바닷가를 넘고,

 11온해에 노(북)아프리카 따박이 사람들인 아마지그가 세운 첫 임금나라인 알모라비데는

안달루시아('남쪽'이라는 뜻) 스페인으로부터 사하라 모래밭 마녁의 몇몇 아프리카 고장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모로코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유럽사람들의,

15온해 뒷가웃부터 벌어진 몇 축 힘씀은 거의 물리쳐졌다.

하지만 나중에 모로코는 1912해 프랑스의 딸림나라(보호국)가 되었으나, 1956해 다시 홀로섰다.


아름답고 기름진 모로코는 모로코의 나들이꾼

이븐 바투타는  "온갖 과일들이 넘쳐나고, 흐르는 물과 찰김(영양)이 많은,

먹거리가 바이 바닥나지 않을 가장 좋은 나라이다."라고 했단다

 

 

탕헤르에 닿아서는 먼저 잠집으로 가서 짐을 풀고 쉰다.

잠집의 뒷뜰 헤엄못

 

 

 

아프리카에서 첫밤을 지냈던 잠집, 어제 겉모습을 못 찍어 떠나기 앞서 찍음

 

 

잠집 둘레. 어제 짐을 풀고 둘러보러 나왔더니,

나이 지긋한 맘씨 좋아 보이는 사람이 달라붙어,

저자(시장)를 구경하러 가자고 길잡이해 주겠다고 5달러면 된다고 구경만하면 된다고

보채는 바람에 떼어내느라 혼났었다. 

달라붙으면 아무 대꾸를 말라고 하던데...

 

 

탕헤르 울안을 큰수레를 타고 지나면서...

스페인 삯큰수레는

포르투갈 리스본 하늘나루로 마중나와서부터 스페인을 떠나는 바르셀로나하늘나루까지

쭉 함께 했다.

 

 

 

 

탕헤르울을 벗어나 페스로 가는 길.

길옆에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모로코는 한 사람마다 2,000인가 3,000달러쯤의 벌이가 된다고

가진것의 틈이 크게 벌어져 잘 사는 사람은 엄청 잘 산단다.

메리(미국)의 이름난 두레가 한 아이만을 가르치는 풀그림을 만들 만큼...

씨갈이에서 나오는 벌이가 큰몫인데 떡꼬장(선인장)을 심어 밭과 밭을 나눈다고...

 

 

길잡이 이야기로는 모로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자리는 오감실피미(교통경찰)이란다.

오감실피미가 되면 벌이가 좋다고 함.

어떻게 든 트집을 잡아 뒷돈을 챙긴다고.

트집이 잡히면 가던 길이 늦어지고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생기니까

좀 집어주고 벗어나는게 좋다는 것이다.

 

 

 

 

 

 

 

 

 

 

떡꼬장에 꽃이 피었다.

 

 

 

 

페스에 가까이 와 가는가 보다.

 

 

페스(아랍말: فاس 파 , 스페인말: Fez 페스, 프랑스말: Fès)는 모로코에 있는 울이며,

사람셈은 1,008,782(2008)이다.
모로코 가운데 노곳의 산기슭의 페스 가람 가에 자리잡고 있다.

모로코의 옛 서울로, 789해 이드리스 이븐 압둘라가 세워 810해 아들 이드리스 2세 때에 이드리스 임금나라의 서울이 되었다.


이제 남아있는 누리에서 가장 오래 된 갈터(대학)인 알카라위인 갈터가

859해 오래를 열어 마그레브 고장의 삶바탕 가운데로 떨쳤다.
13온해에 마리니드 임금나라가 가람 두쪽에 새로운 페스를 세웠다.

그 뒤 이름난 모스크와 눈부신 높채가 지어졌다.

큰저바다와 땅가운데바다를 잇는 오감길에 자리잡아 장사와 만듦일도 꽃피었다.


한때 스페인사람과 유대사람이 많이 살았으며, 프랑스가 들어온 뒤 새로운 울거리가 만들어졌다.

이제 카사블랑카, 라바트, 마라케시 다음가는 모로코 네째 울이다.

메디나로 불리는 옛 거리는 누리 가장 헷갈리는 길로 알려져 있으며,

이슬람 누리의 땅불쑥함을 볼 손 있다.

 유네스코에서 누리삶바탕물림으로 올려놓았다(위키백과).

 

 

 

 

임금높채는 구글땅그림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큰수레를 타고 담을 타고 지나가다 함께 구경하는 어떤 사람이 찍틀로 찍었다고,

지키는 사람들이 수레를 세우고 들어와 찍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고서야 지나가게 하였다.

 

 

  여기서 낮밥을 먹는다

 

 

오른쪽 벽에 걸린 찌검의 사나이가 이 나라 임금이란다.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찌검은 임금안팎.

임금아내는 밖에 내보이지 않고 꼭꼭 숨기는데 이 임금은 널리 아내를 내보인다고...

 

 

메디나라는 헷갈리는 길로 들어간다.

이곳 길잡이를 따라...

이베리아곶에서 쫓겨온 사람들이 이쪽으로 들어와

그들이 쫓아와도 살 손 있도록 이렇게 만들었다나.

무어사람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쳐들어가 다스리다 다시 물러나게 되었었다.

유대사람들도 카토릭으로 바꾸지 않으려면 쫓겨나올 손밖에 없었다.

 

 

 

 

 

 

 

 

 

 

 

 

나무를 대 버티고 있다.

 

 

짐승을 써서 짐을 나르고...

 

 

흰쇠(은) 거리라는 보람인지?

 

 

고치고 있는가 보다 밑그림인가?

 

 

 

 

    

뜨거운 햇볕아래 가죽에 물을 들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곳을 들어갈 때 박하냄새나는 풀 한 줄기씩을 나누어 준다.

 

 

 

 

 

 

 

 

헷갈리는 골목길을 나와 뒤돌아 본다.

 

 

 

 

 

 

다시 큰수레를 타고 카사블랑카로 떠난다...

 

 

 

 

 

 

 

 

 

 

여기까지가 페스인가...

 

 

 

 

 

 

카사블랑카를 먼저 들를 얼거리였는데 리바트부터 들른다.

 

 

라바트는 12온해 알모아데임금나라를 세운 아브드 알 무민이

스페인과 벌인 '지하드'(Jihad 성전)에서 싸울아비들이 머물 싸울아비터(ribat 병영)로 세웠다.

알모아데 임금나라의 3째 술탄인 아부 유수프 야쿠브 알 만수르는

그곳을 라바트알파트('승리의 병영'이라는 뜻)라고 이름했으며,

이제의 땅이름은 라바트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란다.

 

 

 하산쌈과 임금집안 무덤(무하마드 5세와 그 아들 둘) 들락

 

 

 

 

하산쌈
12온해 끝쯤 알모하드 임금나라의 야콥 알만수르가 세우려 했던 쌈인데,

일을 벌인 뒤 얼마 뒤 그가 죽음으로 그만둔 채 남아있다.

한 변이 16저자인 바른네모꼴로 높이는 86저자까지 올릴 얼거리였는데,

44저자까지 올라가다 멈춰졌다.

쌈의 마쪽에 300남짓 하얀 돌기둥들이 줄을 서있는데,

이것들은 그 때 모두 로마에서 가져 온 돌들이란다.

 

 

임금집안 무덤(모하메드 5세와 그의 아들 둘 무덤)


1912해로부터 술탄 벤 유세프는 프랑스의 다스림에 맞서 홑섬일에 앞장서 싸우고,

1956해 3달 홑서게되자, 임금자리에 올라

모하메드 5세가 되었다. 

그뒤 새로운 나라 세움에 힘쓰다가 1961해에 죽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아들 하산 2세(이제 임금의 아버지)가 하산쌈이 있는 마당 끝에 지은 것( 1971해)으로
아랍지음에 요새 지음을 섞어 지었다 한다.

그 뒤 그의 아들 둘이 따라 묻혔다.
푸른빛 지붕은 나락, 꼭대기 3 둥근 공은 알라 모하메드 코란을 뜻한다고...

 

 

이제는 책집(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나

임금이 죽으면 여기에 묻힐 것이란 말이 떠돌고 있다고...

 

 

 

 

 

 

 

 

 

 

 

 

 

 

이제 카사불랑카로 간다.

 

 

카사블랑카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2온해에 이제의 카사블랑카 자리에 안파로 불린 베르베르겨레의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그리스도 믿는 나라의 배들을 몰래 쳐 빼앗는 바닷치기떼 터전이 되자

1468해 포르투갈사람들이 이 마을을 부셔버렸다.


1515해 포르투갈사람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울을 세우고

카사블랑카('하얀 집'이라는 뜻)로 이름지었다.

이 울은 1755해 큰 딸떨림으로 부서진 뒤 버려졌지만,

알라위의 술탄 시디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가 18온해끝에 울을 다시 세웠다.
이 울을 카사블랑카로 부른 스페인의 장사군들과 그밖의 유럽 장사꾼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 벌이었다.

 

 

얼마 뒤 프랑스사람이 다른 유럽사람들보다 많아지면서

메종블랑슈(프랑스말로 '하얀 집'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카사블랑카 못지 않게 널리 알려졌다.

 

 

1961해 모로코의 임금 무하마드 5세가 마라서흘은(주재한) 카사블랑카 모임에서는

아프리카 나라들의 카사블랑카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엄청난 비둘기들이 떼지어 모여 있다.

 

 

프랑스로부터 모르코를 홀로서게한 모하메드 5세를 기려 이름지은 곳.

 

 

 

홀로 서려고 싸울 때 쓴 큰불인가?

 

 

 

 

 

 

하산 메스키타

 

 

이슬람의 모스크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와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에 이어

누리 3째로 큰 모스크 이다.

카사브랑카에는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볼 손 있다.
1980해 첫삽을 떠 1989해(하산 2세 60째 난날)까지  마칠 얼거리였었는데,

1993해까지 4해가 더 걸렸다.

하산 2세 임금이 거의 나리들이 모은 돈으로 온 힘을 쏟아 마무리했다.


6000콥(평)쯤의 집터위에 세워져 25000사람(2켜의 4,000사람 크기의 가시(여자) 빔칸(기도실)을 넣으면 29,000사람)이  함께 절할 손 있고, 200저자의 높이로 누리에서 가장 높다.


모스크의 가웃은 큰저바다 위에 세워졌고, 커다란 괭돌바닥으로 바다의 물결을 볼 손 있단다.
지붕은 여닫을 손 있도록 되었고, 여는 데는 6난(분)쯤 걸린단다.
10,000제곱저자의 나무가 안을 꾸미는데 쓰였고,

3300사람의 모로코 안꾸밈 새김 쏨씨꾼들이 일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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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으로 가려고 탕헤르로 간다.

 

 

 

 

 

 

 

 

여기도 비닐집이 엄청나다

 

 

 

 

 

 

 

 

 

 

2밤 자고 3날의 짧은 모로코 나드리를 마치고, 

다시 지브롤터 좁은 바다를 건너 스페인의 타리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