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그 유래에 대하여
1. 가평군지의 견해
신라 시대지명을 한문화 하면서 지역이 아름다워, 아름다음을 나타내는 가(嘉)를 써서 가평(嘉平) 또는 가평(加平)이라고 부른다
1990년 가평문화원에서 발행한 가평향토지, 1991년 가평군청에서 발행한 가평군지, 1994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현정 선생님이 도서출판 피플뱅크에서 발간한 가평의 자연과 역사 등에서 밝히고 있는 가평의 유래다.
2. 삼국사기 지리지의 견해
(東輿-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일컬음)의 기록에는 가평의 고구려 때 이름이 근평(斤平) 또는 병평(幷平)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근평(斤平) 또는 普(병(並)자의 오기인 듯하다) 平을 (三地硏-삼국사기 지리지 연구회를 일컬음)에서는 ‘큰 발’,‘큰 벌’일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곧 斤의 音이 ‘근’으로 ‘크다’의 매김꼴 ‘큰’을 音借한 것이라고, ‘平’은 ‘발․벌’의 훈차(訓借)한 것이며, ‘幷平’의 幷의 訓이 ‘아밝’으로 ‘幷平’은 아밝, 즉 앏밝→앞밝(南陽 : 南은 앞‘前’자 통함)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斤平은 큰발 곧 ‘커다란 벌판’의 뜻인 ‘大原’을 나타낸 말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사에 실린 내용이지만 삼국사기 지리지 연구회가 밝힌 견해를 그대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정리하면 고구려 시대의 지명 ‘근평(斤平)’은 우리의 순수한 말인 ‘큰 벌’을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다. 이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근평(斤平)과 병평(並平)의 상관 관계에 대한 설명이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초기의 지명인 근평(斤平)과 병평(並平)이 가평(嘉平)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간 부분에 “‘幷平’의 幷의 訓이 ‘아밝’으로 ‘幷平’은 아밝, 즉 앏밝→앞밝(南陽 : 南은 앞‘前’자 통함)의 뜻이라는 것이다.”의 내용이 앞의 부분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글자의 소리와 의미를 가지고 지명 유래를 밝혔다는 것이 이 견해의 나름대로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땅이름학회의 견해
한국땅이름학회 이사이며 사단법인 한배달 학술위원장인 이흥환은 1995년 발간된 대한토목학회지 9호(총 권43호) 104쪽에 ‘땅이름에 깃든 이야기(9) - 경기도 가평(加平)’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맹균의 시와 느낌-중략) 가평은 본디 가일 또는 개곡이라 불리우던 곳,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서면의 상삼의곡, 하삼의곡, 하색현, 상색현, 중색현, 연갈의 6개리를 병합하여 읍내, 달전, 대곡, 경안, 승안, 마장, 개곡,두밀, 하색, 상색의 10개 리로 바꿔, 1937년 가평면에서 1963년 1월 1일 이화, 금대, 산유, 복장의 4개 리를 편입하여 1973년 7월 1일 읍(邑)으로 승격,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가평은 본시 화악산 자락의 산첩첩한 두메산골이었다. 1943년 7월 일제가 북한강 중류 지점인 청평에 수력발전소를 건설, 첫 1호 발전기에서 19,800kw의 전력을, 그리고 같은 해 10월 2호기가 완성되어 총 39,600kw급 수력 발전소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력 발전소가 생겼다.
이 발전소는 광복 뒤 서울, 경기 일원을 위한 전원의 하나로서 중요한 구실을 다하였으나 6․25 때 격심한 피해를 입어 이를 복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966년 9월부터 1968년 9월까지 2년 간에 걸쳐 수력 3호기의 증설로 40,000kw의 전력이 더 보태, 그 시설 용량이 모두 80,000kw 가까이 됨으로서 나라안에서 5대 수력발전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청평댐으로 인해, 가평 고을의 청평은 말 그대로 맑고 공기 좋은 ‘맑은 들’ 즉 ‘청평(淸平)’고을이 되었고, 산 첩첩한 오지 마을인 가일 또는 개곡리(오늘날 가평군 군내면의 가평읍)는 골짜기가 확트여 개곡리(開谷里)가 되었을 뿐더러,
청평호라는 큰 물벌(水平)‘을 하나 더함으로서 땅이름과 같이 ’가평(加平)‘이 되었다.
또 가평읍내 남이섬으로 가는 청평호반의 나루터 어귀는 아파트와 상가가 밀림을 이뤄, 골짜기 이름처럼 ’대곡(垈谷)‘이 되고 말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청평호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린 마을이 ’자잠리(自潛里)‘라니 그 예언적인 땅이름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견해는 가일, 개곡리와 ‘물 벌’에서 가평의 의미를 찾았다. 조금은 우왕좌왕(右往左往)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일 또는 개곡이 가평의 처음 지명이었다.
그러던 것에 청평호라는 ‘물 벌’이 더하여져 가평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가평이라는 지명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설명이다.
청평호는 1943년에 완공된 청평댐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 가평이라는 지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물벌이 더해져서 더할 가(加)를 붙였다는 것은 가평(嘉平, 加平)이라는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 붙여졌다는 약간의 역사적 사실만 안다면 이런 오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4. 언어학적 접근
현재 가평이라는 지역에서 사람들이 최초로 자리잡은 시기는 언제이며, 장소는 어디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대답이 곧 가평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밝히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답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 병평(並平)인 것이다. 근평과 병평에 언어학적 연구는 남․북한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남한에서는 2003년 도수희 교수가 ‘한국의 지명’이라는 책에서 그 유래를 밝혔으며, 북한에서는 1990년 류렬 교수가 ‘조선어 연구’라는 저서에서 그 유래를 밝혔다.
☉ 도수희 교수의 견해
도수희 교수는 근평(斤平)과 병평(並平)의 의미와 두 지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지역의 본래 이름은 ‘가라바라, 가바라, 가버라’ 인데, 그 뜻은 ‘갈라진 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근평(斤平)에서 근(斤)은 ‘가라‘에서 ‘갈’의 음차(音借)이며, 평(平)은 ‘바라, 버라’에서 ‘벌’의 훈차(訓借)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평(並平)에서 병(並)은 ‘갈라진’을 나타내는 훈차(訓借)이며 동시에 ‘갈’ 또는 ‘가라’라는 음가(音價)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지명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음을 그의 저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평(平)은 근평에서의 평(平)과 같다는 것이다. 즉, 읽을 때는 근평(斤平)을 근거로 하고, 지명이 나타내는 의미는 병평(並平)을 근거로 하라는 것이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 근평(斤平)의 근(斤)을 대신하여 음가(音價)가 같은 가(嘉,加)를 사용하여 가평(嘉平) 또는 가평(加平)으로 개명(改名)하였지만, 본래의 지명인 ‘가라바라’의 소리와 뜻을 최대한 살리는 개명 작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류 열 교수의 견해
북한의 언어학자인 류 열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근평(斤平)과 병평(並平)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역의 본래 이름이 ‘가라바라, 가바라, 가라버러’로 도수희 교수의 견해와 같은데, 그 뜻은 ‘나란히 있는 벌’이라고 주장하여 도수희 교수와 그 견해를 달리한다.
즉, 근평(斤平)에서 근(斤)은 ‘가라’의 음차(音借)이며, 평(平)은 ‘바라’의 훈차(訓借)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평(並平)에서 병(並)은 ‘가라’가 의미하는 ‘나란히 있는’을 나타내는 훈차(訓借)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도수희 교수와 같이 읽을 때의 기준은 근평(斤平)으로, 의미는 병평(並平)을 기준으로 하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경덕왕 때, 가평(嘉平,加平)으로 개명할 때도 도수희 교수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전의 지명인 ‘가라바라’의 음가와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는 것이다.
결론지으면 병평이나 가평 모두 본래는 ‘가라바라’로 읽는 것에 견해를 같이 하는 반면, 그 뜻은 ‘갈라진 벌’, ‘나란히 있는 벌’로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두 견해는 언어학적인 분석만 가하여 이곳의 지형에 대한 설명만 하였다. 구체적으로 필자가 앞서 문제를 제기한 이 지역 최초의 정착지와 어떻게 마을이 확대되어 ‘가라바라’라는 지명이 붙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가설들
1. ‘가라’는 가야, 구리로 나타나는 나라나 마을의 의미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가라바라’는 ‘평평한 마을, 평평한 나라’라는 뜻이 될 것이다. 한자로 기록된 최초의 지명인 병평(並平)의 중국음가는 ‘빙핑’이라는 것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구리의 땅이라는 설이다.
가평 묘마루전설에 나오는 청동기문화 집단이 붙인 마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가평읍 승안리에 ‘말 구리’와 달전리의 ‘구리고개’ 등 구리라는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3. 말(馬)의 고대어인 ‘가라, 거라’와 벌에서 왔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현재 마장리(馬場里)라는 지명이 가평에 있기 때문이다.
마장리에는 밤벌의 묘마루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앞마을이 경반리 말구리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말의 고대어 ‘’의 음가와 가장 가까운 병(並)자를 이용하여 최초로 한자 지명인 병평(並平)이 ‘갈발-가라바라’에 가장 가까운 음가를 가지며, 현재 그 의미를 가진 마장리(馬場里)가 가평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4. 강(江)과 평(平)의 고대어인 ‘가람과 벌’의 합성어라는 견해다. 가평에 작은 하천이 많이 있으며, 한강(漢江)의 한 축인 북한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다.
고대 사회에서 큰 강가에 자리 잡은 고을을 가라, 또는 가야라고 했으니, ‘강가에 있는 벌’이라는 견해도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끝으로 '가평' 변두리의 땅, 국경지방의 땅, 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작은 들판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6. 가는 고어로서 '밝다. 크다. 깊다. 구부러지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강,갈대, 나라 등의 기원이 되었다.
가평(嘉平)의 의미를 정리하며
이전까지 가평(嘉平)이라는 지명에 대하여 물어오면 대부분 두 가지로 답했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고장이다.
물론 경치는 지명을 나타내는 한자(漢字)가 말해 주듯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자연 환경에 초점을 맞추어 대답을 한다.
다른 한가지는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우리나라 전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개명할 때, 이 고장을 가평(嘉平)이라고 붙였다는 정도이다. 정작 가평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사실 향토사를 연구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먼저 역사적 지식이 바탕이 되야 하지만, 지명의 어원을 찾을 때는 언어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역 향토사를 보면 몇 몇의 각 시대별 전공자들이 향토사를 나누어서 집필하고, 그것을 묶어서 정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전공자들의 참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협조체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명의 유래는 언어학자들만의 몫도 아니며, 역사학자들만의 몫도 아닌 것이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공동 조사가 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평에 대한 연구도 언어학적인 접근과 역사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언어학자들이 가평의 본래 순수한 우리말 지명인 ‘가라바라’를 밝히고, 그 의미 ‘갈라진 벌’, ‘나란히 있는 벌’, ‘말(馬) 벌’, ‘청동기문화인들의 구리 벌’, ‘큰 강가에 있는 가람 벌’등을 밝혀놓으면, 역사학자들은 이 ‘가라바라’가 왜 백제에서는 병평(並平)으로, 고구려에서는 근평(斤平)으로,
나아가 신라에서는 가평(加平, 嘉平)으로 한자를 바꾸어가며 기록했는지를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이러한 작업은 전혀 없었으며, 가평에 사는 사람들조차 그 정확한 유래를 모르고 지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영위해가는 산, 들, 강 등의 자연환경이 인간의 살과 뼈 즉 육체에 해당한다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밝히는 작업은 살과 뼈에 영혼(靈魂)을 불어넣는 작업일 것이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시체에 불과할 것이며, 육체가 없는 영혼 역시 실체가 없는 귀신(鬼神)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평의 역사와 문화를 밝힌다는 것은 청정한 자연환경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가평에는 평촌이 존재하고 있다. 즉 가평의 한 가운데 평촌이 존재하는데 이는 지명적으로 가평의 뒷 단어를 이루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에 대한 지명으로서의 정확한 정설을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영원히 이 땅에 이름분인 선조들의 뜻을 알지 못할 지도 모른다. 지명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기존의 밝혀진 여러 유래를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의미를 심어주는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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