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들을 뜻하는 '벌(불, 부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구드레(백제) 26째 어라하가 이곳 사비에 서울을 옮겼고,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1온스무해쯤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이 고을에서 나고 자랐건만 이곳 사비에는 자주 오지 못했다. 가람빛(강경)이 가깝고 쇳길이 이쪽으로 나 있어 가람빛 놀메(논산) 한밭(대전) 서울로 다니다 보니...
밑뱀터 6해째 이곳에 바람쏘이러 와서 구경을 한 뒤 ,나라 지키러 갈 때 몸살피러 오고, 나라 일군이 되어 고을그윗곧(군청)에서 한 달 동안 일했지만, 메잣(산성)과 꽃떨바위(낙화암) 따위를 찾아보지 못했으니, 쉰해가 넘어서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흔이 넘으신 가시아버님을 모시고 왔으니 몇 곳만 천천히 돌아 본다.
꽃떨바위에서 바라본 날빛
여기서 구다라의 3즈믄 어라하 색시들이 꽃처럼 몸을 날려 가람물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 하는데,
3즈믄에는 거품이 많이 낀 것 같다.
구다라 마지막 어라하가 나라를 잘못 다스렸다는 것을 그루박으려 그러는 것 같은데...
서라벌보다 힘이 셌던 구다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서라벌로 말미암아 나라가 무너졌으니, 다른 나라와의 사이를 잘 다루지 못한 것이 씼을 손 없는 잘못이다.
부처님오신날이 몇날 앞으로 다가왔다.
1965해 밑뱀터 다닐 때 왔을 때는 둘레 풀밭에 덩그런히 있었던 것 같은데 ,1981해 둘레를 파헤쳐 절이 어떻게 있었는지 얼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때에는 아늑숲절(정림사)이라고 불렀던 것을 알게 되어 아늑숲절터닷켜돌탑(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 뒤 집에는 앉아있는 돌부처를 모셔 놓았다.
구다라가 사비로 서울을 옮기면서 절을 짓고 세웠는데, 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구다라를 무너뜨렸다는 일을 기리는 글을 아랫벽에 새기고 '평제탑'이라고 불려졌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늑숲절(정림사)이라는 절이 있었고 함께 이 탑도 있었다면, 아늑숲절탑(정림사탑)이 되어야지 어찌 아늑숲절터탑(정림사지탑)이 되어야 하는가?
나중에 절터에 세운 탑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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