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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골 마을

하늘꿈꾸미 2017. 10. 8. 12:35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 마을, 언제나 가고 싶을 때면, 찌검을 보며, 마치 그곳에 간 것 같은 느낌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 지난 한가위 시골길에 좀 찍어 왔다.

우리 12뉘 윗 할아버지 무덤이 이 곳에 있으니 그 때쯤 이곳에 뿌리를 내리셨나? 그렇다면 4온~5 해쯤 되었을까?




"앗선(조선)때 처음에는 숲내고을(임천군) 어진사람낯(인세면 仁世面)의 곳이었다. 앗선때 처음에 들못숲(평택임)씨가 와 살면서 그 겨레 마을을 이루고 논밭을 일구었다. 앗선 끝에는 숲내고을 어진사람낯으로서 땅꼴이 구덕 즉 대바구니처럼 생겼으므로 구덕 또는 구데비, 바뀌어 귀덕(歸德)이 되었다 하는데, 1914해 귀덕리라 하고 부여고을 사람길낯(부여군 세도면)에 넣어졌다. 
마을마다는 옛날에 싸울아비들이 머물었던 자리라 하여 싸울아비오래마을(군문리 軍門里)라 부르고, 유씨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라 유가골 또는 유가동, 마을에 풀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풀마당골(초장골), 마을에 정문이 있어 정문거리 따위의 마을이 있으며 마을의 넓이는 2.60제곱즈믄저자(㎢)이고 집들은 142에 사람은 429사람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좀 줄었을 것이다.

사람길낯(세도면) 구덕마을(귀덕리)






어진누리첫뱀터(인세초등학교)를 넘어 쇠말저?(금마저, 익산시) 미르아늑낯(용안면)이 보인다.



마을 모임집에서 어진사람첫뱀터로 가는 길


옛 어진사람첫벰터 앞오래.

내가 배우던 집들은 허물리고, 다시 새로 지어진 배움집들.

이 오래가 옛 오래인데 이곳을 막고, 새로이 오래를 만들고 길을 냈다.

이 배움터는 나라를 되찾고 나서 세워졌는데, 몇 마을에서 배움터를 짖고자 나섰는데, 이곳 배움터 땅을 우리 집안(종중)에서 내서 세우게 되었다 들었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한배움해(학년)에 두 배움방(반)으로 한 방에 60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울로 떠나고 적게 낳다 보니, 한 배움해에 한 배움방으로 줄었다고 여러 해 앞에 들었는데,

그나마 몇 사람씩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새로 낸 어진사람첫뱀터 앞오래.

1971해로 생각된다. 그 때 뱀터웃멀(교장)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집안일을 보시던 아버지께 길을 내고 오래를 새로 내게 해달라고 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그럴려면 우리 집안 메의 나무들을 많이 베어내야 하고 많은 땅이 들어가야 하니, 그렇게 해가면서 오래를 옮길 까닭이 없다고 들어주지 않으셨었다.

그 뒤 많은 해가 지난 언제 인가 이렇게 옮겨졌다. 


새로 낸 길. 여기 좁은 길이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넓혀지고 빼곡히 들어섰던 소나무들도 잘리어 나가고 말았다.



뱀터 마당에 물이 들어찼다 빠졌는지? 논바닥과 높이가 같아서인지 축축하다

내가 다닐 때도 이랬었나?


옛날에는 플라터너스 나무가 더 있었는데, 그리고 앉을방아(시이소오)는 옆쪽으로 있었고.

여기 다닐 때는 여기 와서 많이 놀았다.


2켜 배움집은 없었는데,지금은 모두 2켜로 지어졌다.


길가에 외따로 홀로 있는 이 집터에서 옛날 우리 할아버지께서 가게를 하신 일이 있다 들었다.

내가 갈터꼲음(대학입시)에 붙었을 때, 어머니 꿈에 이 곳 살구나무에 꽃이 핀 것을 보셨단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미리 아셨다고... 



오른쪽 솔이 우거진 곳이 솔메 12뉘 11뉘 9뉘 할아버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판판한 땅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꼴이란다.


망골방죽이라고 알았는데 땅그림에는 망굴로 나온다.

꽤 큰 물가둠못으로 5.8정보쯤 되는 것으로 안다.

어릴 때 첫뱀터 5~6해쯤부터 여기서 여름에 물놀이를 했던 곳이다.

한밭에서도 여기로 낚시를 올만큼 낚시꾼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좀처럼 물이 마르지 않지마는 몹시 가물 때는 물이 말라, 물이 얼마 없을 때, 동네 사람들이 한 데 몰린 물고기를 잡아 나누어 먹었던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때 낚시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나라 지키는 일을 마치고 일터에 나갈 때까지 몇 달 겨를이 있어, 집안 맏(형)의 낚싯대를 빌려 낚시를 몇 날 해 보았다.

그런데 그게 물고기를 낚는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말이다.

몇 날 헛 손질만 하니, 젊은이가 코피가 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앉아서 했던 곳에 앉아서 하는데 잘 잡히지가 않는다.

얼마를 하다 보니, 손바닥 만한 붕어를 좀 잡을 손 있었는데, 붕어가 물었을 때에 손에 느껴지는 그 짜릿한 느낌이 아주 훌륭했다. 

낚시를 오래 해 오셨던 분 말씀이 "밑밥을 던져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잘 지나다니는 곳을 골라 밑밥까지 깔아 놓으면 잘 잡히겠지!


요새 둑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흙으로만 되어 있던 둑에 돌과 자갈을 덮는 것 같다. 위에도 자갈을 깔고.


망굴둑에서 바라 본 아랫들. 깁가람(금강)까지 이어진다.


작은 용매골이라 했던가? 땅그림에는 용마골로 나온다. 미르말골? 

미르말(용마)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미르와 말이 우리 삶과 많이 이어지고 있다.

가운데쯤 우리 논이 좀 있었는데 옛날에...

 

왼쪽이 작은 용매골 오른쪽에 망굴물가둠못


세떼배기라고 불렀는데, 아마 솟대박이가 그렇게 된 것 같다.

엣날에 여기에 솟대가 있었던 듯.

바위가 있었는데 흙으로 덮었다.

이곳에도 길 왼쪽으로 냇가쪽에 우리 논이 있었다. 아직까지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논도 가웃쯤 이었는데 돈에 맞추어 사다 보니, 이쪽 도랑에서 저쪽 냇가까지 사지 못하고 나누어 산 것이다.

이 아래쪽에는 제대로 한 뱀이를 산 것도 있고, 또 나누어 산 것도 있었다.

첫뱀터 다닐 때는 일하시는 아버지께 새참으로 막걸리를 가져다 드리곤 하였다.

아버지는 혼자 일을 하시기도 했는데, 이것을 호락질이라 한다. 

또한 도지라는 것이 있었다.

쌀을 한말인가 한말 가웃인가 얼만가를 다른 사람에게 미리 주면, 그 사람은 모심을 때, 김맬 때 벼벨 때 바슴이라고 했는데 낟알 털 때 인가? 네 날을 와서 일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 품을 미리 사는 것이다.

그리고 품앗이라고 해서 내가 저집 일을 해주면, 그 사람도 내 일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혼자 하면 혼자 이틀 할 것을, 둘이 함께 이 집 하루 저집 하루 하는 것이다.

호락질도 하시고, 도지를 주어 품을 사기도 하시고, 품앗이를 하시거나 그냥 품을 사시거나 그렇게 하셨다.


씨갈이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날마다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할 때는 힘들지만,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논밭을 둘러보고 살펴보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또 가을 걷이를 하고 나면 겨울에는 논밭에서 일하는 일이 옛날에는 없었으니까 그 때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손이 있다.

이런 짬이 나는 때는, 옛날에 책이 드물어, 책을 빌려다 그것을 베끼셨다. 책은 됫글(한자)로 된 것인데, 생각나는 것은 골집안이름저검(만성보)라는 책이다. 

그것을 아버지와 맏이 함께 베끼셨다.

그리고 땟가락(시조)책을 사다가 그것을 읊으셨다.

그 가운데 생각나느 것이

푸른메속의(청산리) 푸른냇물아(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한제 바다에 이르면(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밝은 달(명월)이 하늘과 땅이에 가득(만건곤)하니 쉬어어간들 어떠하리.

우리도 청산리 하며 돌아 다녔던 것이... 


겨울 돈벌이로는 가마니를 친다.

우리들은 새끼를 꼬고, 아버지와 어미니는 가마니틀에서 가마니를 짜서 그것을 10낱씩 묶어 한죽이라고 하나 그렇게 묶어서 가람빛에 나가 파신다.


요즘 시골은 비닐집을 지어 놓고 거기에 여러가지를 심어 가꾸니 겨울에도 바쁘지만...


아버지는 글집(서당)을 밤에 몇 달 나가시다 그만 두신 것이 배움의 모두다. 글집에 다니려면 한달에 철에 따라 쌀이나 보리를 얼마 내야하는데 그게 없어서 그것도 얼마 못 다니신 거였다.

그래도 혼자 익히셔서 됫글로 된 세나라이야기(삼국지) 따위 됫글로 된 것들을 읽으셨다.

글집에 다니실 때 함께 배운 이들이 아저씨는 새로나온 글씨모음(신자전)이십니다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부엉골 어귀 큰용매골 솟대박이 작은용매골 망굴둑이 보인다.

부엉골 논에 언젠가는 참게가 너무 많아 벼를 갉아 먹으므로 참게를 밥솔들이 가서 잡았다.

얼마나 많은지 물통으로 엄청 잡았던 것이다.

그 때는 씨갈이낫(농약)을 얼마 안 썼으니까 논에 미꾸라지며 참게 이런 것이 많았다.

씨갈이낫을 쓴 것이 내 생각으로는 첫뱀터 첫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 내 조카벌이면서 가깝게 지내던 벗 집의 볏단을 쌓아놓은 볏눌에 말벌집이 있어 벌집에 호리돌이라는 아주 쎈낫을 맏님이 치시던 것을 보았던 것이 이제도 어제 일같이 똑똑하다.

 


새매 부엉골 

부엉골에도 우리 논이 너 마지기 있었다. 옛날에 부엉골 물이 잘 마르지 않고 좋은 논 이었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 나는 곳이 잇었다.

아버지께서 돈을 굴리기가 어려우니 어느 만큼 돈(쌀로 사고 판다 한 마지기에 쌀 몇 가마니)이 모이면 논을 사시다 보니, 들 가운데 물가둠못 아래 번듯한 논을 사기보다는 고랑이의 논을 사시다 보니, 이 고랑 저 고랑 논이 흩어져 있어 여기저기 일하러 다녀야 하니 어려웠다.

옛날에는 길미(이자)가 비쌌다. 옛날 시골에서는 장리라 하여 가을에 쌀 한 가마니를 빌려가면 다음 해 가을에 한가마니 닷말을 갚아야 했다. 그러니까 해마다 5할(50%)이 되는 높은 길미다. 그러다 3할이 되고...

그러니 그걸 잘 굴리면 좋지마는 떼이게 되면, 헛 일이니.

그리고 지금처럼 돈가게(은행)가  잘 되어 있지도 않아, 동네에서 이웃끼리 빌려주고 하니,  잘못하면 떼이는 수도 있어 얼마 모이면 논을 사시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30마지기 좀 모자란 논이 9군데에 걸쳐 있은 적이 있었다. 

옛날에는 소가 쟁기로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해서 판판하게 골라 놓으면, 모내기를 하나하나 손은로 해야하고, 김 맨다고 호미와 손으로 모 사이에 난 풀을 뽑고, 피사리라고 논에 난 피를 골라 뽑아내고, 가을이면 참새 떼가 많아 새보러 다녀야 한다. 


소리를 지르고 허수마비를 세우고 하여 쫓는데, 새가 잘 도망가지 않으면, 팡개라고 대나무를 지팡이 만큼 잘라 한쪽에는 가위표로 쪼갠다음 댓살을 잇쑤시게 처럼 깎아 녛어 벌어지게 하여, 젖은 흙을 찍으면 흙이 거기로 들어간다. 그러면 그것을 휘두르면 흙덩이가 빠저서 멀리 날아간다.

그렇게 하여 참새를 쫓았다.  

 

저쪽 마을을 새매라고 불렀는데, 새를 잡아 먹는 매가 그쪽에 많았는가?

가운데쯤에 있는 디새집이 모새울집안의 식게집(재실)이다.


첫뱀터에 다닐 때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아버지는 머리도 좋으신데 뱀터는 안 다니셨더라도 틈틈이 책을 사서 익혀서 꼰음(시험)을 보아 달삯을 받는 이(월급쟁이)가 되시지 않으셨나?

씨갈이를 하는 것은 몸이 힘들기도 하고, 보면 쌀값이 좋을 때는 사먹기도 좋지만 나라에서 쌀을 싸게 낸다고 하고, 쌀값이 쌀 때는 사먹기도 어렵다. 

쌀은 돈받고 내주는 것( 파는 것)을 산다고 하고, 돈을 주고 쌀을 받는 것(사는 것을)을 판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면, 나라나 두레(회사)에 매여서 사는 것 보다, 어쩌면 홀가분하게 씨갈이를 하며 맘대로 사는 것이 매여서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것 보다 훨씬 나을 손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옛날 벼슬을 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벼슬살이라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임금이란 사람에 매이고 늘 머리조아리면서, 잘못 보이면 목숨줄이 간데 없어지고, 그 밑에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요 길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 위쪽에 논은 지금도 맏님이 짓고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우리 맏님이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였는데, 가장 노한과 가까이 있는 곳에서 있다 보니, 마노(남북) 싸울아비들이 서로 넘나들어 목을 베어가기도 하고 머흘어서 차라리 베트남에 가는게 낮겠다 싶어 베트남 가겠다고 하여 비둘기부댄가로 베트남에 가셨었다.

집에는 베트남으로 가는 배 위에서 유무를 알렸다.

그 때 한 해(1969해?)는 가믐이 깊어, 한밭에서 높뱀터 다니며 하숙을 하는데 좀 힘들었는데, 맏님이 부쳐주는 돈이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한달 부쳐오는 돈이 55달라쯤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받는돈의 90%는 떼고 10%만 주었단다.

그리하여 아들이 목숨 걸고 벌은 돈이라 아버지께서 모아서 이 논을 산 것이다. 그것도 나누어서 온뱀이가 못되고.



아버지는 어찌 됐든 아이들은 씨갈이를 시키고 싶진 않으셨던 것 같다.

나한테도 씨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맛을 보라고 논밭에서 일하는 것을 시켜보셨다.

그래서 모내기도 해보고, 김매기도 해보고, 벼도 베어 보고, 논에 보리를 심을 때는 보리씨를 뿌릴 손 있도록 소가 쟁기로 갈아놓은 흙덩이를 쇠스랑으로 두드려 깨서 고르는 일도 해 보게 하셨다.

여름에 콩밭에서 열무 뽑는 일도 해 보도록 하셨다.

씨갈이하는 일이 옆에서 보면 힘들어 보이지 않지만 정말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고 힘들다.

콩밭에서 열무 뽑는 일도 땅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지요, 위에서는 햇볕이 내리 찌지요, 꼬부려서 하니 허리가 아프지요 무릎도 아프지요 참 힘들었던 것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 일을 해 보면서 논밭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나는 이런 일을 하면서 살 손 없겠단 생각이 굳어졌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내가 빨리 커서 훌륭하게 되어, 아버지 어머니를 잘 모셔야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어 내가 나라일꾼꼲음에 붙어 아시로 일할 때 돌아가시니 너무나 슬펐고, 어머니는 그래도 서울로 모시고 살 손 있어서 그나마 조금이나마 아들 노릇은 할 손 있게 해주셨다.


이 마을 가운데쯤이 나의 집저검(호적)이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살은 적이 있어 그곳이 뿌리저검(본적)이 되어 있다.

왼쪽 끝에 집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집이다.

어렸을 적에 집 짓는 것을 보았고, 할아버지께서 큰 네마디맏(사촌형)님과 함께 사셨었다.

어렸을 때는 왜 그리 자주 체했는지 체할 때마다 할아버지께 가서 침을 맞았다.

손 두군데 하고 발 두 군데 네 군데에 침을 놓아주셨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또 다른 데로 가시고, 나중에는 셋째 네마디맏님이 살림 나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마을 사람들이 대섶이라 부른다.

집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서 대숲이 대섶이 된 것이리라.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고조)께서 사셨고, 내가 어렸을 때는 나의 7마디 아저씨가 사시고, 그 왼쪽에 

그 아저씨의 5마디 아저씨(당숙)인 우리 할아버지께서 집을 지어, 두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가 모시고 살았다가 할아버지는 큰집으로 가시고 우리가 살았었다.

그러다 1972해 그 집을 뜯어다 다시 그대로 짓고 지붕만 디새(기와)로 얹은 것이 시골집이다.

그래서 우리집이 새집이라고 불렸었는데 헌 집이 되어도 새집이다. 



이 집이 헐어다 지은 집이다.

외쪽 문을 두 쪽문으로 바꾸고, 홑문을 겹문으로 바꾸고, 지붕을 디새(기와)로 바꾸고는 그대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번말틀(전화)이 들어왔다. 

여기는 우리가 논으로 지어 먹던 곳인데, 집을 짖고 나머지 땅은 밭으로 짓는다.

이 집터 위가 어렸을 적 조실댁이라고 임참봉의 아들네 집이 있었다. 

잘 지은 집이었는데, 어찌 없어졌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밖에 나가 있었으니...

아들 셋에 딸 하나 였는데, 그 맏님 둘이 머리가 좋아 하나는 연세대 화공과 나와 큰 두레(회사)에 들어 갔고, 또 하나는 한밭 높뱀터를 거쳐 서울갈터(서울대) 를 나와 예수갈침흩뿌림(기독교방송) 다슬나눔웃멀(정치부장)까지 했었다. 

어려서는 어느 뱀터를 다녔는지 몰랐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한밭높뱀터와 갈터(대학)까지는 나와 같게 되었다.


오른쪽의 이 집은 우리 큰 집인데, 옛날 이 곳에서 가장 큰 가으면(부자)인 임참봉집을 큰아버지께서 샀다. 임참봉은 즈믄석 지기로 옛날 말을 타고 다녔다 한다. 아랫 할아들 때에 와서 노름을 하여 집안이 기울어 집을 팔게 되었다. 함석을 올린 집이었는데, 5마디 조카가 소를 키운다고 쇠우리를 크게 짓고, 또 벼 말리는 집을 지어 많이 바뀌었다.  

큰 아버지가 집을 사기 앞서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여기 건넌방을 세를 주어 사람들이 와서 살았는데,

고치미(의사)가 아니면서 고치미 노릇하는 사람들(돌팔이라고 한다)이 와서 살았다. 

가람빛(강경)에 고치미집에 가기 어려우니 웬만한 것은 그 사람을 찾아가곤 했었다.   

길 오른쪽 논 위 밭이 있는데 옛날에는 거기 집이 있었다.

보광골댁 아저씨가 사시던 집인데, 그 분은 됫글(한문)을 가르치셨던 분이다.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서 하나 있는 글집(서당)이었다. 가운뱀터를 안 간 아이들이 거기서 됫글을 배웠다.

그리고 그집에는 우리마을에 오직 하나 디딜방아가 있었다.

돌로된 도가니(절구통)을 바닥에 묻고 한쪽 끝을 발로 밟았다가 놓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공이가 도가니에 담긴 낟알을 내리쳐 방아를 찧는 것이다.

그 아저씨 아들이 셋인데 큰 아들이 아들을 두고 노한으로 가서, 그 할아들을 키우셨는데, 나보다 세살 위였던 것 같다. 첫뱀터를 마치고 옛살라비를 떠나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어려서는 뜻이 맞아 함께 놀았다. 

겨울에는 논이나 개울에서 썰매도 함께 타고, 여름이면 물놀이도 함께 하고 메에도 늘러 다니고...

똑똑했었는데 예수의종(목사)이 되었다고 들었다.   






뒷메에서 본 대섶. 

대나무숲을 없애 버렸나 보다. 대나무가 꽉 들어차 우거져 멧비둘기가 많이 날아와 앉았었다.

우리집 뒤에까지 대나무가 있었는데.

대나무로 활을 만들어 비둘기를 잡아보겠다고 화살도 만들어 쏘아 보았는데 얼마 나가지를 않는다.


집터가 무덤이 되었다. 

조금 비탈에 집을 짓다 보니, 여기 마당보다 높은 곳에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에서 1.5저자 높은 곳에 받침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워서 집을 지었다. 그러니 마루 아래 신을 벗어놓는 뜰팡이 있고, 뜰팡아래 마당이 있다.

집은 새녁을 바라보고 있어 아침에는 햇볕이 잘 들어 왔다. 왼쪽에 부엌이 있고, 아랫방 웃방 그리고 골방이라고 불리는 방이 좀 작게 아랫방과 웃방이 붙어 네개의 방이 있었는데, 웃방 골방은 뒤곁과 옆쪽에 오래를 내고 웃방이나 아랫방 골방에서 바로 갈 손 없게 되어 있었다.  


부엌옆에는 작은 도랑(수채)이 있고, 그 위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꽃이 예쁘게 피고, 여름에는 열매가 익어 새콤한 맛을 즐길 손 있었다.

부엌쪽 마당에는 집과 ㄱ이 되도록 헛칸을 지어 여러가지 씨갈이 연장을 두고, 한 쪽은 낟알 갈무리하는 곳으로 썼다.

지붕이 볏집으로 되어 있으니 해마다 이엉을 엮고 용고새를 틀어 지붕을 다시 해야했다.

뒤곁에는 장독대가 있고, 부엌쪽 옆에는 바위가 비스듬히 있었다. 굴뚝이 웃방 골방쪽에 있고 그 언저리에 석류나무가 있었고, 그 위에는 골단추 나무가 있었다.

담을 흙으로 만들었는데 그 위는 용고새를 틀어 덮었다.

장독대 뒤 담 안팎으로 대나무가 자라고 봄에 대싹이 올라 오는 것이 예뻤다.

부억쪽 담장 밖에 잿칸을 지어 밥을 할 때 나온 재를 삼태기에 담아 쌓아 놓았다 거름으로 썼다.

잿칸 아래로 조그만 텃밭이 있었는데 텃밭 울타리가 무우개(무궁화)나무였다.

무우개 나뭇잎이 부드러운 때에는 그 잎을 따서 국을 끓여 먹었는데,아욱국처럼 좀 진득했던 생각이다.

그 남새밭에는 감자도 심고 무우도 배추도 심고 강냉이도 심었었다.


왼쪽이 바깥채인데, 큰집은 농사를 많이 지으니, 머슴을 두었다.

오른쪽 칸이 머슴이 자는 칸이다. 

그 때는 담배를 말아서 파는 것은 비싸고, 풍년초라해서 좀 4~5곱 되는 큰 봉지에 담배 썰은 것을 넣어서 팔았는데, 피울 대는 종이에 말아서 피는 것이다.

그 머슴칸에는 그 담배가 있어서 어린 우리들이 그것을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말아서 몰래 피워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찌나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지, 혼날까 봐 냄새를 없애려 해도 안되는 것이었다.




여기가 종지다리. 어렸을 적에 이곳에서 조개도 잡고 그랬었는데.

지금도 조개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 때는 꽤 큰 개울로 보였는데... 

 
















구실고랑 물가둠못(저수지)라고 불렀는데 땅그림에는 귀덕지라고 나온다.

여름이면 밑뱀터 아랫해까지는 여기 와서 물놀이를 하곤 했다.

처음에는 헤엄을 못치니까 물가에서 놀다가 나중에는 머리를 박고 물장구를 치니 좀 나간다.

그러다가 머리를 들고 헤엄을 치게 되었다.

헤엄을 배우기 앞서 살 살 발을 디디며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움푹 파인 곳이 있어 허우적 거리는데 옆에 있던 벗이 끌어내 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때는 꽤 넓은 물가둠못이었는데 이렇게 작았나?

뒤에 집까지 생기고...







앞에 보이는 마을이 모새울이라고 하는 마을이다.

이곳도 많이 놀러 왔던 곳이다.

고개가 그 때는 높아 보였는데, 왼쪽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밑뱀터 다닐 대는 가을이면 아카시아 씨를 따다 뱀터에 내야 했다.

그리고 뱀터에서 함께 메에 올라 가서 풀씨도 따고 싸리씨도 훑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