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뱀터(중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둑 밖인 이곳도 땅콩이며 수박 참외 따위 씨갈이를 했었고, 가람 가까이는 갈대가 우거져 갈새가 지저귀던 곳이었다.
자갈로 덮은 길은 가끔 큰수레(버스)가 지나가면,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큰수레 지붕을 넘어 하는로 올라 가는데, 뱀터에 다니는 우리들은 거의 걸어서 다니고, 집이 멀은 아이들은 큰수레를 타거나 발술을 타고 다녔었다.
이 놀메큰다리(황산대교)가 놓인 것은 88올림픽이 열린 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다리를 놓겠다고 나라내노라(국회의원)에 나올 때마다 외쳐댔지만 이루어 지지 않았었다.
내가 여기 가람빛가운뱀터(강경중학교)에 다니던 1955~1967해는 노를 젓는 나무배가 나룻배로 사람과 짐을 싣고 다녔다. 나루터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배를 타고 가람을 건너 뱀터에 가고, 또 배를 타고 가람을 건너 집에 가고 하루에 두 제 배를 탔다.
겨울에는 어름이 얼어 배를 타고서 탄 사람들이 왼올(좌우)로 굴러 물결을 일으켜 얼음을 깨면서 배를 타고 다녔다.
얼음이 꽁꽁 얼었을 때는 그냥 걸어서 건넜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건너 본 적은 없었다.
집에서 뱀터까지 4즈믄저자 남짓한 즘게를 걸어 다니며, 함께 다니는 동무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무거운 책보따리를 이 손 저 손 바꾸어 쥐면서, 철마다 바뀌는 논밭을 바라보며 3해를 다녔다. 배우미들은 뱃삯을 내지 않고 다녔다.
다리에서 바라본 나의 시골쪽(누리길낯)
아래는 가람빛쪽과 그 언저리
나무 나룻배가 검은 내를 뿜으며 통통거리는 통통배가 되고,
다시 수레까지 실어나르는 배가 되더니,
드디어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가운뱀터 다닐 때 해섬나라는 시골길도 아스팔트로 덮었다는 말을 듣고,
먼 꿈나라 이야기로 들었는데 우리도 그런 날이 왔다.
꼭대기에 큰 나무가 있는 봉우리가 구슬가시봉우리(옥녀봉)
왼쪽에 불대와 가운데 바라봄대.
불대 좀 오른쪽이 옛날 나룻터다. 거기에 나룻배를 대고 타고 내렸다.
불대와 바라봄대 사이 터진 곳은 돌을 캐냈던 곳이다. 터침몬(다이나마이트)을 터트리면서 돌을 캐냈다.
불대 오른쪽 나룻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서 둑을 넘어 뱀터에 간다.
9:00 뱀터 벌일 때를 맞추려면 걷는데 1때새, 나룻배 기다리고 타는 때새 30난쯤? 일찍 일어나 밥먹고 나서야 한다. 그러니 어머니들은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서 아이들을 보낸다.
날마다 어머니들도 애를 많이 써야한다.
가람빛쪽 다리끝
빛가람뱀터
여기 마치고 처음 와 보는 것 같다.
뱀터 바로 앞에 책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우리말모이(국어사전)와 온가지모이(백과사전)이 두껍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온가지모이라는 책이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졸랐다. 그 책을 사달라고...
그 때 쌀 대엿말 값이었다. 그거는 가운뱀터 다니는 네가 볼 책이 아니라고 말리셨지만 조르고 졸라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시골에서 아이들 가르치려면 엄청 부지런하고 아껴야 한다.
우리 아버지 쌀을 몇 말씩 지고 가을빛 저자에 파시고 꼭 며리한 것만 사 가지고 낮밥때가 되기 앞서 집에 오신다. 다른 사람들은 오랫만에 가람빛저자에 오면 막걸리도 한 그릇 하고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바로 오신다.
거기에 만든별(인공위성)이야기며 큰땅사이터짐몬(대륙간탄도탄) 따위 여러가지를 뒤져 보며 알아 나갔다.
첫 해에 같은 방에서 배우던 아이 가운데 하나가 울(도시) 물을 먹은 아이가 있었다. 얼굴이 까매서 깜둥이라고 했는데, 짖굿기도 해서 가르쳐보려(교생실습) 온 배꽃갈터(이화여대) 배우미를 울리기도 하였다. 그 아이 이야기가 높뱀터에서 가장 좋은 뱀터는 서울둘레높뱀터(경기고등학교)고 갈터(대학)에서는 옥스포드 케임브리지라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높뱀터 갈터 이런 것은 잘 알지도 못하던 때인데, 다만 가운뱀터로서는 그 언저리에서는 가람빛가운뱀터가 좋다고 해서 온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러면 나는 그런 곳에 가야되겠다 생각했다.
저 뒤로는 이름도 아름다운 무늬구름메(채운산)가 있다.
그리하여 뱀터노래에 구름무늬메 푸른 솔을 바라보면서, 저 멀리 굽이티는 깁가람 물결에 ...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 몸품마당이 그 때는 엄청나게 넓어 보였는데 이제 보니 왜 이렇게 좁은지?
그 때는 달마다 꼲아서(시험쳐서)그 열매를 종이에 써서 붙였다.
그리하여 누구에게 지기 싫어서 부지런히 하였더니,
첫 해에 여러 제 첫재를 하니 두째 해에는 뱀터에서 배우미들이 뽑지 않고, 스승님들이 시켜서 온뱀터 배우미모임버금우두머리(전교학생부회장)를 시켜주었다.
그런데 한 해 8방 480사람이 있는데, 첫째라는 것도 짐스럽고, 배운 것 꼲아서 그런 것도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뱀터에서 배우는 것도 시원찮아 보이고 어찌어찌하여 꼲음에 심드렁해지니 그 열매도 그럭저럭 좋을 손이 없었다.
그러면서 뱀터에서 배우지 않는 이런 저런 책을 빌려서 보고, 앞서가는 생각미립이라든가 배로하는 숨쉬기라든가 여러사람 앞에서 말하기라든가 들을 읽으며, 뱀터 오가는 길에 배로숨쉬기를 해보기도 하고,, 빛가람에 주먹쓰는길(태권도) 배움마당이 싸움길집?(무도관)하고 푸른길집(청도관)이라고 둘 있었는데, 청도관이란 곳에 몇 달 다니기도 하였다.
그런데 꼲음에 열매가 좋지 않으니 집에서 주먹쓰는길은 그만 배우라고 하여 품새만 배우다 그만 두었다.
여기 이 몸품마당에서 조영식박사라는 사람이 잉글말 모음(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던 생각도 난다.
그리고 포드니 록펠러 따위를 읽으니 꼭 배움터를 다녀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방을 맡으셨던 장기룡 스승님이 불러 왜 곦음열매가 나쁜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 보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온뱀터 배우미를 여기에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달아 달아 밝은달아 이 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랫말에서 이태백이 놀던을 넣어서는 안된다고...이 태백이 술 마시고 놀던 사람 그런 노래는 좋지 않다는 그런 말은 그럴 듯도 하다 했는데...
노한(북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주검으로 거름(비료)을 만든다고 하면서 김일성이 가짜라고....
했던 생각이 이 몸품마당을 보니 생각난다.
사람 주검으로 거름을 만든다는 그 말이 참으로 뜨끔했던 생각이 난다.
거짓으로 배우미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다 셋째 해가 되니 높뱀터에 가야하는데 어디를 가야 하나?
서울둘레높뱀터는 여기 가람빛가운뱀터에서는 이태 앞에 한 사람 들어간 일이 있었다 하였다.
서울까지 가서 배울려면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많이 들텐데,
시골에 여덟마디맞(8촌형)님이 서울에 서울둘레높뱀터에만 들어가면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밥주고 잠자리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붙는다는 것도 모르겠고 어쨌든 뱀터들어가는 꼲음을 뚫으려면 부지런히 배워야 했으니, 부지런히 뱀터에서 가르치는 것을 배우고 꼲음열매를 올리는 길 밖에 없어...
잉글말을 가르치시던 전병언 스승님 말씀으론 잉글말은 서울둘레높뱀터에 넉넉하다고 하셨는데...
높뱀터는 한밭에 한밭높뱀터(대전고등학교)가 괜찮은 곳이라고 하고, 서울보다는 가깝고, 거기에는 아버지엄네마디(외사촌)도 있으니 거기로 가기로 하였다.
할머니는 말릴잣?(노성)댁으로 놀메고을(논산군) 말릴메낯(노성면)에서 시집오셨다.
니산현(尼山)이 노성(魯城)현이 되었다니 들이 넓고 메가 높지 않아 메에서 말려서 아니면 비구니들이 있는 메라? 아무래도 앞쪽일까?
일곱살 때 바탕배움터에 들어가기 앞서, 한 제 아버지엄세마디(외삼촌)께서 살고 계시던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때는 아버지 네마디께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밭으로 옮겨 사셨다.
그리하여 함께 배우던 벗 7~8사람이 한밭높뱀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가람빛가운뱀터는 우리 4 맏아우가운데 셋이 다닌 배움터다.
맏님도 여기 다녔고 바로 밑에 아우도 여기 다녔다.
막내 아우는 여기를 안 다니고 가운뱀터를 안 다니고 가름꼲음(검정고시)으로 가름하였다.
보람이 가람빛그위(강경지청)에서 놀메그위(논산지청)로 가람빛집(강경지원)에서 놀메집(논산지원)으로 바뀌었다.
옛날에 오른쪽으로 중화각이란 됫먹거리집이 있어서 처음으로 짜장면을 먹었던 집인데 없어졌다.
여기도 강경경찰서에서 논산경찰서로
1966해 가운뱀터 두 해째 스승의날 일 때문에, 가람빛가운뱀터 배우미내노라로 여기서 가람빛 배움터 배우미내노라들이 모임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프랑카드니 이런 말들로 좀 어리둥절했던 생각이 난다.
옛 가람빛가시높뱀터(강경여자고등학교)가 가람빛높뱀터(강경고등학교)가 되었다.
왼쪽은 가람빛가시가운뱀터(강경여중)
새로이 생기는 배움터들은 가운뱀터가 사내가시 함께 배우는데,
옛날부터 있던 배움터들은 이렇게 갈라서 가르치나?
스승의날 기림쌈(기념탑)
가람빛장삿일높뱀터(강격상업고등학교)
장삿일높뱀터(상업고등학교)가 무슨 아름뱀터(정보학교)라고 바꾸는데 여기는 그대로 쓰는가?
장삿일아름뱀터라고도 보이고
아우둘이 여기를 다녔다.
아버지는 나도 여기 들어가서 돈가게 들어가기를 바라셧지만 나는 여기는 절대로 안 간다.
해서 한밭으로 서울로 뒷바라지 하시느라 애쓰셨다.
바로 밑에 아우는 여기를 첫째로 들어가 배움을 돋구는 돈도 받아 그 돈으로 발술(자전거)을 사서 그것을 타고 배움터를 다녔다.
여기를 마치고 한나라돈가게(한국은행)에 들어가 쭉 다니고 이제는 나와서 어떤 돈흐름모임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다.
막내도 여기를 다녀 나랏일군이 되어 다니다, 얼마 앞에 나왔다.
배움터에 다닐 때는 일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메가 거룩이날메?(성흥산)이다.
메 왼쪽 기슭에 솟아 보이는 부여 10날빛에 드는 사랑나무는 바다물로부터 240저자에 있는 느티나무다.
바탕배움터 4해째인가 5해째인가 가을에 이곳으로 배움터에서 바람쏘이러 간 적이 있다.
그 가까이에 큰새절(대조사)이 있는데 구다라(백제) 때인 500몇 해에 세워졌는데,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늙은 스님이 이 바위 밑에서 길을 닦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이 절을 큰새절(대조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단다.
물이 어찌된 일인지 더럽고 냄새가 좋지 않다.
여기서 뱀터 다닐 때 와보면, 이 둘레에 긴 동그라미기둥꼴의 새우젖통이 길가에 뒹굴고 새우젓 냄새가 났던 생각이 난다. 그 때는 젖갈 집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온 가람빛이 젖갈집으로 덮였다.
함께 발술타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는 이곳 젖갈이 잘 되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
곧 가을철 김장철에 안갈무리메(내장산)로 물든잎 구경가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여기 가람빛에 들러 김장에 쓸 젖갈을 사간다는 것이다.
구경큰수레(관광버스)가 여기를 오가며 들른다는 것이다.
1889해 무리메섟(군산항)이 생기기 앞에는 가람빛이 부르나(평양) 달구벌(대구)과 함께 우리나라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저자였다고 한다.
무리메섟이 생기고 또 쇳길이 생기면서 가람빛의 구실이 적어지며 시들어 갔던 것이다.
어려서 닷새마다 열리는 가람빛저자에 와 보면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나 아버지를 잃을까 걱정이 되었었다. 윗저자터 아랫저자터 하며 저자터는 말할 것 없고 그냥 거리에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이 자리에 흰별굿판마당(은성극장)이 있어 뱀터에서 배우미들이 볼 만한 것은 스승님들이 데리고 모아서 보러 왔다.
이제는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장사가 안 되었던지 언젠가 돈가게로 바뀌고 말았다.
이곳은 가람빛참에 가까이 있던 것이고
이 곳은 가람빛굿판마당(강경극장)이 있던 자리다.
여기는 구슬가시봉우리에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가람빛에 굿판마당이 두 곳 있었는데 모두 문을 닫고, 여기는 감자국집이 되었다.
뱀터 다닐 때 이곳도 와서 구경했었는데...
사람들은 더 큰 울로 떠나 적어지고 , 오감이 빨라지고 쉬워지니 시골굿판마당이 견딜 손이 없었나 보다.
가람빛은 시골의 어린 아이가 더 넓은 누리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된 곳이다.
누리발자취(세계사)를 배우며 온 누리를 알게 되고, 더 큰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자 하는 꿈을 키우 준 곳이다.
갑자기 많은 때새를 배워야 하는 잉글말을 마주하면서 왜 남의 나라말을 모든 배우미가 이렇게 많이 배워야 하는지? 며리한 사람만 배우고 그 짬을 다른데 써야지 왜 모두 남의 나라말 배우는데 많은 때새를 헛 되이 쓰는가?
잘못된 일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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