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동그라미가 콘수에그라(마을이 작아 더 큰 땅그림에나 나타남)
똘레도에서 60즈믄저자 떨어짐
그라나다에서 콘수에그라까지는 꽤 먼 즘게
그라나다에서 머문 잠집
이런 바위메도 보이고
햇볕으로 번힘을 만드는 곳...
뜻하지 않은 스페인나드리에서 뜻하지 않게 세르반테스를 만나게 된다.
돌아와 알아 보니,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는 마드리드에서 15마일 떨어진
Alcala de Henares에서 1547/9/29에 태어난 것 같단다.
미겔의 아버지 로드리고는 갈리시아사람으로 머리깍으미이면서 째는 고치미(외과 의사)였다.
그의 할아버지 주앙은 몇 듬부림의(행정적) 자리를 가진 힘있는 듬다루미(법률가)였고,
작은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까브라 울꼭지(mayor of Cabra) 였었다고.
그의 어머니(Leonor de Cortinas)는 아르간다에서 태어났는데,
가진 것을 모두 날리고 1543해에 딸을 팔아 시집보낸 으시네(귀족)의 셋째딸로
1593/10/19에 돌아갔다고.
미겔의 젊은 때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렸을 때 이 마을 저 마을로 밥솔을 따라 많이 옮겨다녔던 것 같단다.
이 때 그는 술집가시(Josefina Catalina de Parez)를 만나,
미치도록 사랑하여 둘이 함께 달아날 얼거리를 세웠는데,
슬프게도 그 가시의 아버지한테 들키고 말아
조세피나는 세르반테스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다고.
미겔의 아버지는 빚에 쪼들렸고 살림이 어려웠단다.
어떤이는 미겔이 살라망카 갈터(대학)에 다녔다고 하나 갓대가 없고,
코르도바나 세비야의 야소모임에서 배웠다는 어림도 있단다.
그가 왜 까스띨을 떠나야 했는지는 모른다.
그가 칼을 휘둘르고 달아난 같은 이름의 배우미였는지,
둘의 겨룸(결투)에서 안토니오 드 시구라라는 사람을 다치게 해서
임금의 붙잡는 긔걸(체포영장)로부터 달아난 것인지 알 손 없다고.
어쨌든 이태로 간것은
그 때 젊은이들이 겪음을 넓히려 가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1570해까지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이 차지한 나폴리에 있던 스페인 바다싸움꾼 싸우미로 일했다. 1571해 9달 그는 필맆 2뉘의 가웃쪽 모든아우(서동생)인 아우스트리아가 이끄는
10/7 레판토 바닷싸움에서 오토만 배들을 물리쳤다.
몸뜨검으로 쓰러졌지만, 세르반테스는 배밑에 머물기를 뿌리치고,
그는 뱃전위에서 꺽지게 싸웠고, 세 군데 불을 맞았단다. 가슴에 두 곳 팔에 한 곳.
팔은 그로 말미암아 쓸 손 없게 되었다.
그는 늘 그 싸움에서의 그의 움직임을 자랑스럽게 돌아다 보았다.
그는 유럽의 발자취를 이루는 일에 끼었다고 믿었다.
레판토 싸움 뒤로 6달 남짓 동안,
세르반테스는 다시 싸움떼에 들어가도록 다친데가 낳을 때까지 고침터에 있어야 했다.
1572해에서 1575해까지 거의 나폴리에 있으면서, 그는 싸움꾼으로의 삶을 이어갔다.
그는 코르푸와 나바리노 먼싸움에 끼었고,
1574해 튜니스의 무너짐과 구레트가 터키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575/9/6또는 7날 세르반테스는, 세사 공작이 임금에게 새드(소개하)는 유무를 가지고,
나폴리에서 바로셀로나로 가는 배(galley Sol)를 타고 있었다.
9/26날 아침 까딸란 바닷가에 다가갈 때 알바니아 바닷훔치미배가 쳐들어 왔다.
거세게 맞서싸웠으나 배 우두머리와 많은 뱃사람들이 죽고
나머지는 사로잡혀 혀(포로)로 알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알제에서 5해 동안 종으로 보낸 뒤,
네 축 달아나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버이와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이 돈을 물어 풀려나
마드리드에 있는 밥솔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라나다 잠집을 떠나 여기까지 3때새 가웃쯤 걸려...
이 바람게비 방앗칸은 2켜로 되어 있어,
윗켜에는 60~70즈믄Kg쯤 나가는 밀자루를 올려 놓고,
바람으로 바람개비를 돌려 밀을 찧었다.
1980해띠 처음까지 움직였었다고...
라 만차에 있는 많은 바람개비방앗칸 가운데 옛모습으로 잘 되돌려진 곳
저 멀리 잣이 있고...
앞에 구경꾼들이 타고 온 큰수레는 여기까지 올라와.
똘레도에 가까워 진듯
스페인의 가운데 자리잡은 똘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마쪽으로 74즈믄저자 떨어진 옛잣울이다.
1561해 필리페 2뉘가 높채를 마드리드로 옮길 때까지 오랫동안 스페인의 서울이었다.
노쪽을 빼고는 빨리 흐르는 타호(Tajo, 잉글말 Tagus, 포르투갈말 Tejo) 가람에 둘러 싸여,
골짜기에 우뚝 솟은 바위벼랑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왼쪽 가운데에 높은 것이 알까사르, 그 오른쪽에 뾰죽한 것이 똘레도 큰거룩집
6때새 넘게 왔으니, 구경은 먹고 나서...
저 위에 보이는 것이 알까사르(Alcazar).
커다란 높채가 거룩집과 함께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요즘 모습의 잣은 깨비로마임금나라(신성로마제국) 찰스 5뉘(1515-56다스림)의 높채로
16온해에 처음 지어졌다고.
이 잣은 18온해 처음과 19온해 크게 부서졌었고,
스페인 안싸움 처음(1936-39)에 거의 부서졌었다.
요즘은 싸움보여줌집(전쟁박물관)과 고장 책집으로도 쓰인다고.
타고 올라가면서 찍은 똘레도 울
돌로 덮어 깔은 길바닥
똘레도 큰거룩집이 보인다
고딕꼴 거룩집은 13온해 처음부터 짓기를 벌려서 뒤에 여러 꼴들이 덧붙여진다.
이 거룩집은 스페인 맨위 대주교가 있는 곳이다.
16온해 스페인에 가장 잘 알려진 거룩집들에 마주해 널리 일컬어진 말은 다음과같다:
똘레도가 가장 넉넉(rich)하고, 세비야는 가장 크며,
산티아고는 가장 튼튼하(strong)고 그리고 레온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털염소가죽으로 만든 바이불
가운데가 알까사르, 왼쪽이 큰거룩집
똘레도를 떠나 마드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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