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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바르셀로나)에 가다5(6/8)

하늘꿈꾸미 2013. 7. 5. 22:39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사라고사 하늘나루인가?

 

 

 

 

 

 

 

 

 

 

 

 

 

 

 

 

  이제 바르셀로나에 들어온 것인지?

사라고사 잠집을 떠난지 3때새 가웃이 넘었다

 

 

 여긴 무덤들인가?

 

 

 

맨 윗쪽 왼쪽이 구엘놀이터, 그 아래 오른쪽이 거룩한 밥솔 거룩집(성 가족 성당)

그 아래 왼쪽이 람브라 거리, 오른쪽이 비르셀로나 바닷가

왼쪽 밑이 유대사람의 메(몬주익)

 

드디어 바르셀로나 바닷가에 닿았다(4때새만에)

 

사람셈 160골 남짓, 언저리까지는 450골쯤 되는 큰울로, 스페인에서 2째 유럽에서 6째 울이다.

 

 

 

 

 

 

 

 

여기서 낮밥을 먹고

 

 

바르셀로나 바닷가는 누리의 가장 좋은 10 울바닷가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바르셀로나는 그 길이가 모두 4.5즈믄저자에 이르는 7 바닷가를 가지고 있다.

 

 

 

 

 

 

 

 

 

 

 

 

 

 

 

 

지나가면서 찍은 높이 60저자의 콜럼버스 구리꼴

오른손으로 그가 찾은 아메리카를 가리키고 있단다

 

 

 

 

몬쥬익(Montjuic)은 "유대사람의 메" 또는 "쥬피터의 언덕"이란 뜻이라고

 

 

 

"역사와 예술의 나라, 스페인

찬란한 고도 바르셀로나 이곳에

동방의 아침의 나라,대한민국 경기도

그 힘찬 빛이 같이 어리어 있나니

아, 이 뜨거운 우정 만방에, 영원하여라"

 

라고 새겨져 있다

 

 

1992해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쇠목걸이를 딴

황영조

 

 

 

 

 

 

올림픽이 열렸던 겨룸마당

왼쪽에 고래가 거꾸로 세워져 있는 것이 올림픽 거룩한 불대(성화대)

고래 꼬리쪽에 불을 밝혔다.

 

 

 

 

 

 유무오감쌈(통신탑)

 

 

 

 

 

 

 

 

 

 

 

 

 

 

 

 

 

 

 

 

옛 모뉴멘탈 숫소싸움터

바르셀로나에서는 숫소싸움을 못하게 되었고

사고파는 저자가 되었다고

 

 

 

 

 

 

 

 

가우디가 지은 거룩한 밥솔 거룩집(Sagrada Familia)

1882해부터 짓기 벌이었으나,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는 1883부터 일을 이어받아 그 멋대로 짓기 벌이었다.

1926해 그의 나이 73살때 일의 1/4도 마치지 못하였다.

짓는 일은 오직 아람(개인)들이 낸돈에 기대었기 때문에 천천히 이루어질 손밖에 없었다.

스페인 안싸움때는 그쳐졌고, 1950해띠에 와서야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2010해에 와서야 가운데 찜을 지나고,

가우디 죽은지 100해되는 2026해에 끝마칠 것으로 내다보인단다.

그런데 가우디는 번수레(전차)에 치어 죽었다니...

 

 

 

 

 

 

 

 

 

 

 

 

 

 

 

 

 

 

 

 

 

 

 

 

 

 

 

 

 

 

 

 

 

 

 

 

 

 

 

 

 

 

 

 

 

  

 

 

 

 

 

언저리에 있는 가게에서 팔고 있는 작게 만든 꼴

 

 

 

 

 

 

 

 

 

구엘놀이터에 들어간다

 

 

 

처음엔 Eusebi Guell 백작이 생각해낸 장삿속으로 잘 되지 못한 집터였었다.

그는 잉글나라의 놀이 울(garden city)에서 실마리를 찾았었다.

이곳은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민둥메였다.

이곳에는 시골집들이 있었고 잘 사는 사람들의 집도 옆에 있었다.

그리하여 내나는 만듦터에서 멀리 떨어진 맑은 숨폐와 그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날빛을 가진

훌륭한 집을 지을 60낱의 세모진 집터를 마련했던 것이다.

구엘도 일에 힘을 돋구려 1906해 시골집으로 옮겨왔다.

드디어 가우디가 밑그림을 그리지 않은 두 채만이 지어졌다.

하나는 보임집이었는데, 1904해 마무리되자마자 팔려고 내놓았으나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구엘은 가우디에게 사라고 해서 가우디가 사서 1906해에 옮겨와 1926해까지 살았다.

 

그리하여 이곳은 이 고장의 놀이터로 된 것이다.

 

 

 

 

 

 

 

 

 

 

 

 

 

 

 

 

 

 

 

 

 

 

 

 

 

 

 

 

 

 

 

 

 

 

 

 

 

 

 

 

 

 

 

 

 

 

 

 

 

 

 

 

 

 

 

 

 

 

 

 

 

 

 

 

 

 

 

 

 

 

 

 

이 집이 가우디가 살았던 집으로

1963해부터는 가우디 집 보임집(House Museum)이 되고

1969해부터는 나라의 내라 발자취 기림몬이 되었다. 

 

 

남은 짬을 람브라거리에서 구경하고

 

 

 

  

 

 

 

 

 

 

 

 

 

 

 

 

 

 

 

 

 

다시 큰수레에 올라

 

 

 

 

 

 

 

 

 

저녁을 먹을 우리먹거리집으로

 

 

 

 

가야금 먹거리집이 스페인에 셋이 있다고

 

 

여기서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내고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거쳐 서울로 돌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