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간나들이란 글을 썼더니 한 살매 애꿎고 슬끔(슬프고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종들을 너무 깔본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종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이어져 왔고 없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져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새로운 일들을 알게 되고, 엄청난 놀라움과 함께 우리 발자취를 바로 알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옛앗선(고조선)에 8듬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셋이 남아 내려오고 있는데
① 사람을 죽인 놈은 죽인다. ② 남을 다치게 한 놈은 낟알로 에움(배상)한다. ③ 남의 것을 훔친 놈은 데려다 종(노비)으로 삼으며, 벗어나려면 1사람마다 50골(만)전을 내야 한다는 것 따위라 하니 그 옛날부터 종이란 것이 있어 온 것인데,
반드시 뉘뉘로 이어받도록 되어 있지 않고 그 스스로 일을 하게 하여 그에게 부끄러움을 주자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 뒤 세나라 때에는 싸움에서 사로 잡힌이 돈 빌린이 아주 못사는이 따위로 말미암아 종이 생겨났고, 큰서라벌 때에는 큰벼슬아치 집에 종이 3,000이나 있었다는 적음이 있다 한다.
뒤에 왕건 때에, 싸움터에 나간 사람이 잡아온 혀(포로)를 잡아온 사람에게 넘겨주도록 하고, 따라서 뉘뉘로 물려받는 듬을 만들었으니, 한제 종이 되면 즈믄골 해가 가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은 온누리 예나 이제나 있지 않았던 일이다.
고려 태조는 일찍이 혀를 풀어줘 여늬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큰 이바지를 한 벼슬아치들의 뜻을 살펴 그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종 5해에 비로소 “종은 어미를 따른다.”는 듬을 만들었으니, 처음에는 반드시 아비를 따랐기 때문이다.
성종 6해에 도로종만듦듬(노비환천법)을 만들었는데, 종을 벗어난 사람들이 해달이 지나 차츰 멀어가면 어쩌다 그 알범을 깔보는 일이 있으므로 듬을 만들어 “비록 이미 종을 벗어났다하더라도 어쩌다 옛 알범에게 나쁜 말을 하거나 옛알범의 피붙이와 서로 맞서는 사람은 다시 종으로 만든다.” 하였으니, 그 듬도 있어서는 안 될 듬이다. 언제까지 옛 알범을 섬겨야 한단 말인가!
이도(세종)가 애 낳은 종을 쉬게 하였다고 추켜세운 글이 있었다 하여 그가 얼마나 사람을 사람답게 살폈는가에 마주해서 어떤 사람이 내세운 것(조선 노비제 비판. 세종 노비 복지 노비종모법 고찰:사기꾼감별사)을 간추려 보자면,
참은 고려때 5~10% 아래였던 종이 이도의 종은 어미를 따른다는 듬(노비종모법) 때문에 앗선(조선) 백성의 40~70%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앗선은 종나라(노예제국가)로 바다건너갈이(해외학자)들에게 딱지 맞게 됐다고 한다.
이도는 그 아버지 이방원이 세웠던 종은 아비를 따른다듬(노비종부법)을 무너뜨리고, 종이 종에서 벗어날 미립을 막아버렸다.
애 낳은 뒤 쉬게 해주고 한글을 쓰게 해 줄터이니 종이 되라고 하면 누가 좋다고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도가 이 나라 나리 40~70%의 할어버이들에게 한 나쁜짓
①종은 어미를 따른다 듬(종이 되면 벗어날 손 없다) 으로 온 나라 사람의 가웃을 몇 온 해 종으로 바꾸어버린 것
②종의 사람으로서의 힘(인권)을 없애는 종은 이르지 못하는 듬(부민고소금지법)을 만든 것
※뒤에 마무리된 경국대전에서는 종이 알범을 이르면 목을 매 죽이도록 되어 있다.
③ 명나라에 색시를 바치려 이도가 손수 10여 제 색시(처녀)를 고른(간택한) 것
※명나라 심부름꾼(사신)은 앗선임금도 못보는 앗선임금적음(조선왕조실록)을 볼 손 있었고,
이도는 명나라 심부름꾼에게 바로 4제 절하고, 면복(면류관과 곤룡포)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4제 절하고, 향을 피운 뒤 골해(만세)를 부르며 4제 절한 뒤, 명 임금(황제)을 돕고자 발을 굴러 손수 춤을 추고, 또 4제 절을 한 짓이 1419해에 꼼꼼히 적혀 있단다.
※황제에게 바쳐진 색시만 이방원 40사람, 이도 74사람이었단다. 색시 바침이 한 때 멈췄던 적도 있으나 20해 도 되지 않아, 다시 생겨 11째 임금인 중종때까지 앗선의 색시 바침은 줄곧 이어졌다.
명나라 심부름꾼이 제 것으로 끌고간 색시까지 더하면 몇 즈믄 사람이 된다고 하는 갈말(학설)도 있다. 11째 중종 때 끝난 색시 바침은 다시 16째 인조부터 청나라에게 바쳐진다.
※이도는 12해 동안 명나라 바칠 색시를 꼼꼼히 골랐는데 1426해 12달 한달 동안은 10 제를 손수 온나라 여덟길(팔도)에서 올라온 색시를 명나라에 바치려 고르는 일을 보았다. 아름다운 색시를 고르는데 뛰어난 눈을 가진 이도는 색시를 밝히게 되었을까?
어지러운 짓거리로 이도가 임금으로 있던 동안에 그곳탈(성병)로 죽어나간 높채색시(궁녀)가 100사람이 넘는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야사)도 있단다.
※이도가 42살때 걸린 탈은 담(매독)이 아니라 임질 이라는 내세움도 있단다.
④ 명나라에 색시를 바치려 나라에 한살하지마라는 긔걸( 결혼금지령)을 내렸다.
⑤ 4군 6진을 일구는 가운데 종 색시들을 싸울아비들의 노리개로 발린(배치한) 짓
⑥ 꽃계집(기생)이 없는 고장에서는 여늬집(민가)의 지어미(유부녀)와 술가게(주막업소)의 딸을 억지로 꼭집어 싸울아비들과 잠자리에 들게 한 짓 따위는 이도의 일이니 바이(절대로) 꾸짖음을 벗어날 손 없다는 것이다.
※싸울아비(군인) 노리개(성노예)는 이도로부터 1800해뉘까지 줄곧 이어졌다.
이도가 발린 날압은색시(천민여자)들은 싸울아비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그 딸들까지 물려 받게 하였으니 그 같은 때 온누리에 이도처럼 가시 노리개(성-노-예)를 듬으로 억지로 뉘물린(세습) 일은 없단다. 300해 앞 예수싸울아비(십자군)들이 데리고 다니던 몸파는계집들조차 억지로 대물림시키진 않았단다.
※율곡이이는 종을 111사람이나 가지고 있던 어버이 밑에서 자라났고
퇴계이황은 367사람의 종을 가진 땅가으면(대지주)이었단다. -이이, 이황 분재기-
※앗선의 종은 집짐승 처럼, 한 구 두 구라는 하나치로 세어졌으며, 계집종을 사고 팔때는 뱃속의 아기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종의 값은 조랑말의 가웃(반) 밖에 되지 않았다.
이도의 도움으로 조랑말 가웃마리 값이면, 온 나라 사람의 가웃을 종으로 살 손 있는 때가 왔으며, 사자마자 종의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할 손도 있었던 것이다. 앗선백성의 가웃인 종들의 발자취에서는 앞걸음을 몇 온해 뒷거름 치게 한 이도야말로 하늘을 함께 일 손 없는(불구대천) 백발(원수)인 것이고 고려의 중 '신돈'과 몽골사람 '코르구즈' 같은 이는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새바다(동양)와 저바다(서양)에서는 적어도 같은 겨레를 종으로 삼아 돈으로 사고팔고 뉘물림시키는 짓은 없어져 가고 있었다. 명나라뿐만 아니라 몇 온 해 앞의 송나라때부터 종을 뉘물림시키는 것에 마주해 싸움혀(전쟁포로)나 허물있는사람(범죄자)인 자옥에만 종으로 삼고 그것도 1뉘로 묶어 뉘물림은 안되었다. 이도가 1432해에 종 어미따름듬(종모법)으로 종 셈을 늘리기 40해 앞서, 명나라는 명태조 주원장이 손수 나서서 나랏듬으로 아예 아람(사)종을 옹글게 없애 버렸다.
비록 몰래 종을 쓰는 명나라 힘센이들도 있었으나, 없애는 것이 나라듬이었고 이는 같은 겨레를 종으로 부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길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 0사람인 나라가 바람직한 누리임에 황제에서 종까지 온나라사람의 뜻이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도는 벼슬아치들이 딱맞게 "100해 안에 모든 종이 여늬 사람과 짝을 이뤄 없어질 것"을 걱정했던 말에 거든다. 이도는 같은 때 "명나라, 해섬(니혼), 유럽사람이 가졌던 생각 같은 겨레를 종으로 부리는 것이 쪽팔리고 부끄러운 못된짓" 임에 빈틈없이 머리를 젖고 막은 것이다. 종이 0사람인 나라는 이도가 이루고자 하는 바람직한 나라가 아니며, 으시네(양반)들에게 날벼락인 것이다. 종들이 여늬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이도에게 있어서는 꾀바른 사갈짓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으시네들과 나라가 가진것인 종이 죽으면 안되니까 알맞게 애낳은 뒤 쉬는날 따위를 던져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이도를 오늘날 거룩한 임금으로 꾸며 섬기고 있으니 놀랍고 안타까운 일이다.
니혼도 돈으로 사고팔아 뉘물림까지 시키는 종은 3% 아래로 줄곧 줄어 들고 있었단다. 덧붙여 니혼은 사무라이들이 여러 곳에서 들고 일어나도 앙띠를 주지않는 일들도 있었으나, 앗선의 이도처럼 종이 알범에게 애꿎은 일을 겪어도 알범을 이를 손 없도록 듬(부민고소금지법)을 만들어 대못질 해둔 나라는 없단다.
저바다에서는 이도의 종은 어미를 따른다듬(종종모법 1432년)보다 330해 빠른 때인, 1102해 잉글나라 런던공의회에서 예수믿는이 사이에 종을 사고팔지 못하게 했다.
(뒤로 싸움혀 같은 벗어난 것은 있다.)
그 열매로 앗선 끝에 들어온 아메리카와 러시아의 나드리꾼들이 적어논 것을 보면 앗선으시네들이 같은 겨레를 종으로 부리고 있는 끔찍한 일을 보고 엄청 놀라는 것이 나온다.
또한 그리스정교회를 믿었던 몽골(원나라)인으로서 코르구즈가 정동행성 평장사로 고려에 온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나랏일을 뭇방치기(간섭)하려 왔던 코르구즈지만, 같은 겨레를 종으로 삼는 소슬(풍습)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코르구즈는 고려에서 어버이 가운데 하나가 여늬 사람이면 여늬 사람이다(일양즉양법)라는 앞선 종 없애기를 하려해, 그 때 고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종들이 그위죵(송사)을 거니 나랏일이 자가품날(마비될) 만큼이었으며, 종 풀어줌의 크기가 내다봄을 뛰어넘었을 때 충렬왕과 가진이들이 세게 맞서는 바람에 2해 만에 코르구즈는 고려를 떠나야 했다.
※고려발자취를 엮은 앗선임금나라(이도때 엮음)에서는 오로지 충렬왕이 몽골 임금에게 올린는 맞섬글(반대상표)과, '코르구즈가 고려의 구순함(화목)을 깨뜨린다는' 어비맏(귀족)들의 떠들썩한 글만 남겨놓고 있으며, 코르구즈의 종 다슬꾀(정책)에 마주한 알맹이는 모조리 지우고, 홑 한 줄만 남겨 두었다.
700해 앞 한곶(한반도)을 뒤집어 놓을뻔 했던 종풀어줌에 앞장선이 코르구즈(활리길사)가 누군지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이도의 종 애나은 뒤 쉬게함만 그루박을(강조할) 뿐, 이도의 종 어미따름듬(종종모법)과 한제 종은 뉘물림 종(일천즉천), 싸울아비 노리개(군인성-노-예)로 말미암은 잘못을 또한 눈꼽만큼도 가르치지 않는다. 500해 동안 사람 가웃 넘게 집짐승으로 다루는 것이 임금 이도 때문에 뿌리깊게 되었는데, 이것을 무슨 일로 에낄(상쇄할) 손 있단 말인가? 발자취를 내리파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런 날압은(천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앗선 온 곳에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태어날 아기가 여느 사람(양민)이 될 거란 바람을 품고있던 아기가진 종어미에게 얼마나 큰 날벼락이었을까? 성나 돌아버릴 이들에게 고작 애 나은 뒤 쉼(종출산휴가제)이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 500해 내내 조랑말 가웃마리 값으로 이웃집 사람을 살 손 있게 된 으시네들은 살기좋은(태평성대) 그럴듯한(사이비)우두머리 이도에 마주한 치켜세움으로 앗선임금적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나쁜 임금이 저지를 손 있는 가장 나쁜 짓이 백성 가웃을 죽이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 가웃을 종으로 삼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을 거룩한 임금이라고 온나라 사람이 믿고 섬기고 있었으니, 그리고 아직도 나리내셈(민주주의)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 이 때에도 서울 한 복판에 그 꼴을 크게 높이 세워놓고 있으니!!!
앗선 사람셈에서 으시네는 2%를 넘지 못했다 한다. 황현은 흥선대원군이 전주이씨의 셈을 불리려 10골(만)사람을 받아들이더니 앞으로 앗선임금집을 떠받칠 100골(만) 큰 싸울아비(대군)를 얻었다며 사품쳤(감격했)던 일을 매천야록에 적어두었는데, 이를 보면 으시네가 엄청나게 늘어난 까닭을 알아챌 손 있다.
앗선에서 니혼에 나라를 뺏기는 때의, 사람셈 헤아림에서 으시네는 충남, 충북, 경북, 서울, 전북 밖의 나머지 모든 곳은 1% 아래로 살펴진다.
(니혼 갈이가 철종때 으시네를 70%으로 잡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으시네 집안이름을 모두 더해도 고른 2%를 넘지 못하는데...
오늘날 김이박 으로 내로라하는 으시네 집안이름이 저마다 몇 온골(백만)사람을 거느린 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다.
하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라 사람들의 가웃은 종이고 어떤 으시네들은 종을 2000~3000씩 거느린다 종은 새끼를 돌보지 않는데 일할 만한 나이가 되면 알범이 바로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하멜떠다님적음-
어느 갈이는 종이 가장 많았던 때에는 종이 80%까지 올라갔다고 내세우는 자옥도 있다. 도라갈터(제주대) 조성륜 가르침이는 서울사람의 75%가 종이었다고 보았다.
이런 종틀거리는 니혼의 쳐들어옴(임진왜란1592)에 이르러서야 크게 바뀌게 된다. 앗선은 종들이 니혼에 붙는 것을 매우 걱정하였고, 으시네들 조차 이대로 가다간 종과 땅 모두 잃을 것이 뚜렷했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어려운 동안 종들에게도 싸움이바지와 싸움몬, 나랏돈(쌀13섬)에 도움을 준 자옥 풀어주는 다슬꾀를 쓰게 된다.
잇따른 싸움과 큰 굶주림으로 구실을 낼 여느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은 다음에야 종을 줄이고 여느 사람을 늘릴 손 밖에 없게 된다.
※앗선끝에 쓰인 종 고르잡(조절하)는 것이 다시 종 어미따름듬('종종모법')이라 헷갈릴 사람들도 있겠다. 이때에는 사람셈짜임이 무너졌기 때문에, 사내종이 가시 여느 사람에게 장가가는 일이 많아진 자옥의 이야기 이다. 이미 앗선 가운데쯤에 종셈이 온 나라사람의 가웃을 넘어설 만큼 많아졌다. 그것이 싸움과 잡혀감, 큰 굶주림, 훔치미떼 따위로 말미암아 사내 셈이 아예 적어졌던 것이다. 벼를 심는데 힘을 쓰는 사내가 있어야 하기에 한 사내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더 며리해 졌으며, 사내 종들 가운데는 가시 여느 사람과 한 살 되었다. 이렇게 여느 가시와의 사이에 난 아이는, 어미를 따라 종에서 벗어나 여느 사람이 되고, 사내들은 모자란 구실(세금)을 내고 나라지키는 일을 맡는다.
영조, 정조, 순조때 그윗(공)종이 적어지고 풀어지는 거니를 살펴보자면, 현종때의 경신큰굶주림(1670)과 숙종때(1695)에 일어난 을해큰굶주림으로 온나라 땅은 제대로 지어질 손 없고 그윗종들이 달아나는 일들이 잦아지는 가운데 영조가 임금이 된다.
영조는 그윗종들을 묶어서 하나가 달아날 때에는 남아있는 종들에게 함께 앙띠를 지도록 하여(종비총제) 서로 살피도록 하였으나, 하지만 이건 그윗종들에게 달아나길 부채질 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뒤늦게 짐(신공)을 낮춰줄 손 밖에 없게 된다. 그마저도 때가 늦어버려 영조, 정조, 순조로 이어지는 몇 열해 동안 그윗종 적엄(장부)은 있으나마나 되어 버렸다. 순조는 그윗종 틀거리를 없앨 손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쩌다 앗선 벼슬아치 으시네들과 성호이익같은 시골의 갈이들 가운데 종틀거리를 좋지 않게 말하는 공자따름이(유학자)들이 나오긴 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제 집안 종을 바로 풀어주며 말대로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쩌다 다른 으시네들의 꾸지람이 두려워 제 말을 잘못된 말이라고 뉘우친 송시열도 있단다. 송시열도 제 집안 종 만큼은 값진 것(재산)으로 보아 종요롭게 생각 하고 있었다. 과거라는 꼬늠에 붙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500해 동안 깨침(철학)만 내리판 사람들이 드글거렸던 앗선에서, 남을 깨닫게 할 만큼의 종풀어줌졸가리(해방이론)는 나오지 못했다.
어떤 종들에 마주해 땅불쑥하게 베푼 것을 부풀리는 일에 마주해
종이 몇 온골(백만)사람이었으니 그 가운데에는 잘생기거나 솜씨, 힘, 하는 짓이 뛰어나서 알범의 마음에 드는 자옥이 있었을 것이다. 으시네들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몇 가닥의 보기를 들어 앗선 종틀거리를 아름답게 덧씌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밥숟가락 몇 수저 더 먹여 주고, 동네 모임에 몇 차례 더 끼워 줬다는 저검(기록) 때문에, 종과 여느 사람사이의 금을 흐리게 물타기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앗선종틀거리가 좋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옹골진 옛종틀거리 나라인 로마에서는 종였던 아버지를 둔 페르티낙스는 로마황제까지 올라갔으며, 중국 고계흥은 형남의 임금이었다. 이슬람, 인도의 센나라들 가운데에는 종 였던 사람들은 어비맏(귀족)들 옆에서 온갖것을 누리다 오르고 올라 칼자루를 쥐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으니, 여기서 힘, 사람됨 좋은 종들은 옛종틀거리에서조차 높은 자리에 나갈 까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어떤 종들은 아예 배움이 뛰어나 어비맏들의 집가르치미가 된 사람들도 있다.
로마라틴어 맨첫 이야기책이 종였던 안드로니쿠스가 뒤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임을 모르는가? 앗선에서 종 였던 이야기꾼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도 보다 까마득한 몇 온 즈믄 해 앞의 옛 일들이다.
※이도의 종 장영실을 부축일게 아니라 이도보다 100해나 앞선 때에 공민왕은 종(어미가 종) 매골승(시체처리) 였던 신돈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 라는 발자취에 남을만한 엄청난 자리를 맡겨 나랏일을 두루살피게 하였다. 이도의 종 어미따름 듬(종모법) 앞에만 하더라도, 백성의 가웃인 종들에게도 나라 벼슬 자리가 열려있었던 있었던 것이다.
이도의 종 어미따름 듬(종종모법)이 가져온 끔찍한 열매(생물학적)
※앗선때 이도의 종 어이따름 듬(종종모법)으로 종들은 으시네집 아들들에게 몬(물건)처럼 뉘뉘로 물려지게 되니, 무려 500해 동안 계집 종 아랫뉘들과 으시네의 아랫뉘들이 피붙이흘레(근친상간)를 하였다는 내세움이다. 계집종들은 여느 사람이나 으시네에 시집가서는 안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종들 끼리 한살돼야 했다. 곧 으시네가 손댄 계집 종이 아이를 가져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또는 알아도 종이 되니, 으시네 아랫뉘들이 흘레개가 되어 참기 힘들 때면, 제집 계집종 아랫뉘 종들(제 피붙이 일 손 있는)을 불러다 뉘뉘로 피붙이흘레를 하는 것이다. 으시네집과 종들 사이의 피붙이 불림(번식)이 바탕이 안 좋은 종들을 태어게 할 것이며, 으시네들은 이들을 500해 동안 다스리기 쉬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덜떨어지게 태어난 종이나 어제 같이 잔 계집 종이 제 핏줄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뒤에 종들이 알범의 집안이름(성)을 갖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
The Great Human Diasporas에서 한나라 사람의 물림꼴바탕(유전형질)에 마주한 야릇한 내리팜 열매도 위의 일을 뒷받침한단다. 나라안에서는 썩 즐겁지 않은 내리팜이다.
※유럽의 합스부르크 임금집안의 물림이 덜떨어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바탕갈 내리팜으로 드러났단다.
1432해 이루어진 이도의 종 어미따름 듬이 여러 모에서 얼마나 끔찍한 열매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지 않고 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제대로 내리파 살펴보려는 사람조차 없다.
종 틀거리는 1894해에 가서야 없어지게 된다.
'생각가는 대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과 집안이름 (0) | 2018.06.10 |
---|---|
내발로 걷는다는 것 (0) | 2018.06.08 |
종의 간나들 (0) | 2017.12.04 |
어르신 딱지 (0) | 2017.07.14 |
촛불! 그 뜻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0) | 2016.12.03 |